한줄 詩

별빛 한 짐 - 이원규

마루안 2019. 10. 23. 23:10



별빛 한 짐 - 이원규



두 눈이 나빠져도 별은 보인다
빗점골에 쏟아지는 별빛들이 아까워
늦가을 다람쥐처럼 한 자루 가득 채웠다


이역천리 서울 가는 길
깡마른 몸 지게에 별빛 한 짐 지고 갔더니
와 이리 캄캄하노?
철 지난 노래처럼 슬슬 눈길을 피했다
인사동 뒷골목엔 내다버릴 곳이 없었다
그래, 서울이 좀 더 밝아졌을 뿐이야
노안의 두 눈을 질끈 감고
풀이 푹 죽은 별빛 한 자루를 둘러맸다


지하철 3호선 심야 고속버스 갈아타고
까무룩 섬진강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다람쥐꼬리를 감추며 말했다
에휴, 쌀자루에 쌀은 안 담아 오고
전기밥솥 코드를 뽑아버렸다


조금 굶는다고 아무 데나 거미줄 치랴
자정 넘어 섬진강 백사장에 나가
풀이 푹 죽은 별빛 자루를 열자마자
호르르 반딧불이들이 날아올랐다
쥐 나도록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는데
어찔 비칠 현기증이 일었다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별들이 빛났다



*시집, 달빛을 깨물다, 천년의시작








물에 찔리다 - 이원규



아무래도 너무 멀리 온 게 분명해
지천명의 강변에 서서
저 바람의 손바닥에 두 뺨을 내주고
목울대 꺼이꺼이 무릎을 꿇는다


저 환한 능소화에 눈멀지 못하고
이 달큰한 꽃향기에 숨 멎지 못하고
저 여린 풀잎에 피 한 방울 내주지 못하고
이 슬픈 여자에게 더 깊이 중독되지 못하고


물속에도 뼈가 있어
눈물의 염전에는 안구건조증의 소금 뼈
내 심장의 증기기관차에는 고드름 칼
혈관도 얽히고설킨 녹슨 철삿줄
부드러운 혀마저 급속 냉동된 흉기


이도 저도 아닌 후안무치의 사내가
벼랑 끝 희푸른 달빛 가발을 덮어쓰고
눈구멍 안쪽의 얇고 작은 눈물뼈
누골(漏骨)에 대해 생각한다






# 이원규 시인은 1962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계명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학>에 1989년 <실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빨치산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달빛을 깨물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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