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스무 살 슬리퍼의 퇴임사 - 서범석

마루안 2019. 10. 22. 22:41



스무 살 슬리퍼의 퇴임사 - 서범석



너는 떠나고 나 홀로다,를
햇살 밝은 방바닥에 펼친다
질긴 20년이 나를 허물지 않았느냐,를
닳고 해진 뒤꿈치에 새긴다
당신의 온몸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살았다,를
비스듬히 파인 뒤축에 숨긴다
너와 더 살더라도 너는 날 버렸을 거다,를
낡고 병든 몸으로 가슴 벅차게 말한다
우리 둘을 엮어 준 등줄기는 아직 멀쩡하다,를
벌레 먹은 낙엽같이 추억으로 남긴다
앞코가 지금도 용기 있게 나갈 수 있도록 사랑이 가벼웠다,를
너의 사랑이었다고 입속으로 읽는다
네가 방 안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를
기꺼이 고백한다
네가 떠난 이 방을 나도 지킬 수 없다,를
내 사랑에게 분명하게 밝힌다
너의 퇴임이 나의 정년이었다,를
질질 끌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쓰레기통으로 간다
짧지 않았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하늘로 갈 것이다



*시집, 짐작되는 평촌역, 황금알








언제 속옷을 벗는가 - 서범석



겨울에 입었던 속옷을 언제쯤 벗는가
10대 이하는 논외로 하고
관찰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20대는 입지 않았기에 벗을 날도 없다
30대는 삼일절 태극기 걸 즈음에 벗고
40대는 식목일 나무 심을 즈음에 벗는다
50대는 어린이날 나들이 나갈 즈음에
60대는 현충일 묵념할 즈음에 겨우 벗는다
그리고 70대 이후는 거칠 것 없으므로
아무 때나 벗어도 좋으리


속옷은 그렇다치고
겉옷은 언제 어떻게 벗는단 말인가
저렇게 실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 서범석 시인은 1948년 충북 충주 출생으로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7년 <시와의식>에 평론, 1995년 <시와의식>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풍경화 다섯>, <휩풀>, <종이 없는 벽지>, <하느님의 카메라>, <짐작되는 평촌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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