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잣나무를 탓하다 - 한우진

마루안 2019. 10. 21. 19:18



잣나무를 탓하다 - 한우진



이 음식 저 음식에

고명, 고명하며 엄지 치켜세우더니만

서리 맞은 뒤의 열매가 최고!

비늘잣, 통잣 얹고 띄우고 후르륵거리더니만

큰비에 산사태가 잣나무 때문이라고

그것도 지난 정권(政權) 녹화사업, 소나무 아닌 잣나무 때문이라고


백김치 담글 때 전화로 엄니, 엄니!

어쩌다 수정과나 식혜에도

숨넘어갈 듯 찾아대던 고명 같은 어머니,

눈 속의 열매라며 달게 빨아먹던 자식들

이 수술 저 수술 정신없이 몇 해 지나고

기울어진 가계가 병든 어머니 때문이라고

그것도 하체부실 자앗나무, 잣나무 닮은 어머니 때문이라고


요양원 가파른 비탈에 엉거주춤

잣이 털린 잣방울, 껍질이 바짝 마르고 있다



*시집, 지상제면소, 책나무출판사








가을의 급소(急所)는 옷소매 같다 - 한우진



칡뿌레기 냉면 한 그릇 해치우고 서늘한

삼패동 소쿠리마을*을 바라본다. 삐그덕

단풍이 제 빛깔에 빗장을 친다.

자결을 결심한 성리학자(性理學者)는 강기슭에 다다랐다.

춥다. 가을의 급소는 옷소매 같다.

삐걱 삐걱, 강으로 달려들던 개울이

돌멩이 물고 단추를 채운다. 단정하다.

꽃은 무릎을 꺾고 소리를 덮는다.

발목이 욱신거린다. 작은 별이 쌓인다.

저녁이 강 끝에 불의 눈을 높게 매달고 미끄러진다.

급소를 가진 것들은 외롭다.


역사의 급소는 유배지에 있고

가을의 급소는 옷소매 안에 있는 것만 같다.

건드리면 아프다. 시리다.

가을은 뼈 있는 것들을 소리 나게 한다.

삐걱삐걱, 소리를 채는 사슴이다.

쫓기는 사슴의 그늘처럼

패자의 유배지, 건드리면 아프다.

뱀이 누른 갈대가 일어선다. 누렇다.

죽은 성리학자가 악수를 청한다.

내 손이 닿자 그의 뼈가 급소를 들이받는다.

용수철이다, 용수철!**

결사항전의 사슴이다.



*김식(金湜 1482~1520,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며 기묘팔현(己卯八賢) 중의 한 사람)의 묘가 있는 남양주시의 마을 이름.

**사슴이 죽게 되었을 때, 숨을 곳을 면밀히 가리지 않고 질주한다는 뜻. 여기서 音(소리)은 蔭(그늘)의 뜻으로 쓰인 것, 즉 그늘진 곳, 또는 숨을 곳. (春秋左氏傳)






# 한우진 시인은 1956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2005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시집으로 <까마귀의 껍질>, <지상제면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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