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 배영옥

마루안 2019. 10. 21. 19:49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 배영옥



나는 끝내
의자 아래 묻힌 신전을 모를 것이고
의자 또한 나를 모를 것이고
의자 위의 사과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데
나는 오늘도 의자를 기다리는 사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애써 소환하는 사람
의자를 관(棺)처럼 떠받드는 사람
오래도록 동행해야 할 목숨과
매일매일 불화하는 사람
짙어지는 어둠과
푸르른 이끼를 끌어다 덮는 사람
그러니 나날이 봉분을 쌓는 어지럼증이여
의자를 경배하라
나는 오늘도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뿌리 깊은 의자에 묻히노니,
아무도 나를 찾지 마라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늦게 온 사람 - 배영옥



눈앞에 문이 있어도
당신은
문을 보지 못한다


내가 당신의 방패가 되어주었다면
내가 당신을 안아줄 수 있었다면
문밖에서 함부로 문을 닫지 않았을 텐데


문 안에서 그리워하는 사람은
안팎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사람


그리하여 한번 늦은 사람은
영원히 늦은 사람


눈앞에 문이 있어도
당신은
문을 보지 못한다


당신은 한참이나 늦어버린 사람
이미 늦은 사람





*시인의 말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 말하지 않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발설하였으므로.


내가 끝내 영원으로 돌아간다 한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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