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닻을 내린 배 - 성윤석

마루안 2019. 10. 22. 22:52



닻을 내린 배 - 성윤석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나의 배는 저 먼바다에 떠 있네.
일한 값을 받지 못한 나의 선원들이 몇 타고 있었지만,
녹슨 갑판이며, 찢어진 저인망 그물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네.
닻을 닮아 가을 올 때 피는 닻꽃 한 송이를 꺾어 바다에 던져두고
나는 부두에서 일용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나의 배는 한때 더럽혀진 영토를
떠나, 돛을 높이 올려 조롱과 참담한 시절을 건너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다네.
나는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으나, 깃발에 부푼 나의 배.
그 배는 홀로 거침없이 가는 배로 알려졌다네.
더러운 계절이 오고 가고 한때 배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나에게서 그 무엇도 남기고 싶지 않았으나,
나에게서 갓 낳은 얘기 웃음과 노모와의 저녁 식사, 딸아이의 전화를
받아내기 위해 아아, 항구에 들어오지 못한 채 먼 바다 물결에
점을 찍듯 닻을 내린 선원들
나, 비로소 그 물결에 다시 나아갈 때까지
부두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네, 제법 어울린다고
누군가 손을 들어 맞받아쳐주었네.
닻을 내린 저 배야
세상에서의 향유(享有)란 어려운 법
다 와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생이네.


닻은 내렸으나.
바람과 물결에 맡긴 나의 배
바람 불어라.
나 지긋이 눈 감고 다시 물 위에 섰으니.



*시집, 멍게, 문학과지성








죽음 - 성윤석



1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블랙유머다. 노을이 구천(九天)으로 깨어져
다시 속을 뒤집는다 해도 우리는 스스로 발광하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다만, 누군가가 닫힌 책을 열 때, 강물은 한 번 두 번 세 번 빛난다.


2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물방울 튀는 저 꽃잎이
헛것이라 하더라도 이 몸 일체가 썩는다 하더라도 수 천 년을 살아온
이 나,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을 것임으로 다시 열일곱이 되어
이 별을 딛고 크게 울어 보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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