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순자 씨의 마네킹 - 이원규

마루안 2020. 2. 27. 19:26



순자 씨의 마네킹 - 이원규

-일생 단 한 편의 시 11



거제도 한복집 순자 씨는

앉은자리 그대로 일평생 바느질을 했다

저린 다리 주무르며 치자꽃 저고리 연분홍 치마

밤새 한 벌 다 지을 때마다 맨 먼저

사지 멀쩡한 마네킹의 알몸부터 가려주었다


거제 앞바다에 바람이 불어도

한 벌 또 한 벌 갈아입힐 때마다

아이들의 키는 쑥쑥 자라고

순자 씨 대신 입은 한복이 수천 벌

마네킹 날마다 선녀였다 황진이였다가

양귀비였다 수줍은 새색시였지만

순자 씨는 바느질 자세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다


병실 찾아온 다 큰 자식들 성화에

33년 세월의 현대고전한복 간판 내리던 날

부라더미싱 반짇고리 어루만지다

이삿짐 트럭 시동 거는 소리에 내다보니

짐칸 고무 밧줄에 사지가 묶인 마네킹

비뚜루 서있는 여인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아저씨, 잠깐, 잠깐만요 일어서는데

소아마비 한쪽 다리가 풀썩 주저앉았다

점점 멀어지는 마네킹을 부르며

자야, 순자야, 안순자!

난생처음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새였다



*시집, 달빛을 깨물다, 천년의시작








고목 - 이원규

-일생 단 한 편의 시 10



세상도 사람도 도대체 컹컹 수컷뿐이라예!


지리산에 깃든 마흔일곱 살 미옥 씨

홀로 아이 둘 키우며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악양골 화개골의 할매 할배 찾아가

삐걱대는 관절 주무르며 딸이 되고 아내가 되어

목욕시켜 주고 장도 봐주는데


읍내 다방 아가씨며 술집 마담이며

천하의 난봉꾼 목통골의 그 영감

마누라 죽자 잘 걷지도 못하고 치매에 걸리더니

봄날 오후에 벌떡 일어났다


임자, 너무 외로워 천날만날 몬 살겄어

저 산도 팔고 땅도 팔아 고마 내 다 주께!

칠순 영감이 옥이 씨 두 손 잡고 매달렸다

화악, 신고합니데이!

충혈된 눈빛 뿌리치며 대문을 나서는데


친정 홀아버지 생각에 코끝이 찡하고

십 리 벚꽃 길 고목 옆구리에 불끈 벚꽃은 또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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