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변에서 시간 - 김왕노

마루안 2020. 4. 21. 22:29



해변에서 시간 - 김왕노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해변이구나.
말들이 날뛰는 해변에서 권태로운 고흐가 귀를 자르고
해바라기 끝없이 즐비한 언덕을 스쳐 유성처럼 흘러가는 장대 열차
나는 보이는 세상만 세상인 줄 알았으나 이 몽환의 시간이 좋구나.
바다를 향해 선 수목장한 나무에서 커다란 이파리가
얼굴로 돋아나 해풍에 파닥이는 이 신화 같은 날에
내 허기는 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애정결핍의 가슴으로부터 온다.
난 숨어서 하는 은밀한 키스보다 긴 머리카락 나부끼는
바람 속의 키스를 오래전부터 꿈꿔 왔다.
이룬 사랑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경전처럼 읽으며
그리움의 아슬아슬한 난간을 지나왔다.
보이는 일로 바빴던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일로 바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흘러가는 구름이나 꽃, 비나 비행기와 배보다
보인다 하면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다 하면 보이는 이 몽환의 세상
모래에 묻힌 하얗게 부푼 네 복숭아뼈처럼 아름답구나.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점박이 - 김왕노



저렇게 피가 섞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 밥그릇 바닥까지 닳도록 끝없이 삭삭 핥는
왕성한 식욕의 저 혓바닥은
흘레붙어 피를 섞다가 돋아난 붉은 이파리 같은 것
황구니 똥개니 뭐라고 불러도 꼬리 치는
걷어차여도 욕해도 다가오며 꼬리 치는 철면피
앉으면 민망한 줄 모르고 삐져나오는 붉은 생식기
먼 암캐를 찾아가 뒤를 붙이고 싶어 날마다 앓는 좆
지워도 지울 수 없는 판에 박은 우리의 자화상







# 김왕노 시인은 1957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공주교육대학과 아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 년에 대하여>,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이별 그 후의 날들> 등이 있다. 한국해양문학대상, 지리산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수원시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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