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벌레의 시간 - 안태현

마루안 2020. 5. 16. 22:21

 

 

자벌레의 시간 - 안태현

 

 

나는 여전히 숲을 통과하는 중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불타는 연두 속에 갇혀 있다

나무들이 술렁거릴 때마다 멀미가 일어서 마지막에 닿을 겨울 항구를 떠올리게 된다

 

숲은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부러지고 쓰러지는 고통을

무한하게 허용하는 세계

 

끌어안아야 하는 가슴들이 너무 많아서

바람 부는 밤엔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떠다니며 울어댄다

갈 곳을 찾아 헤맨다

 

아무것도 모의 한 바 없는 내 생도 거기에 있어서

 

나는 숲의 이면을 들추고

드나드는 모든 흔적을 일일이 기록하려는 근시처럼 기어서 기어이 간다

느리지만 빛나는 태도로

 

목이 달아난 꽃들을 줍기도 하면서

데인 듯이

한 시절을 지나간다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시로여는세상

 

 

 

 

 

 

어느 날 갈피 - 안태현

 

 

골목이 잘 녹아있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면

주머니에 주일 성격학교 달란트가 들어있는 듯

얼마쯤 눈부시다

 

저녁 말미에는

소품 같은 감정들이 자주 핀다

 

나의 생계는

서가에 꽂힌 두꺼운 책 같아서

함께 기숙하고 있는 포만감을 모르고

 

금박을 입은 채

점집을 기웃거리며

남은 생에

기다릴만한 운세 하나쯤 더 간직하고 싶은데

그런 게 사람이다

 

무른 생선과 낡은 깃발과 깨진 유리창들

두 발로 옮겨야 할 이야기들은 들끓고

 

골목은 끝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골목이 많은 내 몸의 갈피에는

쓸모없는 후일담처럼

나도 모르게 지운 이야기가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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