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민들레 착륙기 - 조미희

마루안 2020. 5. 15. 18:49



민들레 착륙기 - 조미희



한 줄기 폭발음 뒤에 소리가 사라지고

정적 속으로 홀씨가 발사됐다


민들레는 바람보다 빠르게 날아올라

혜성과 같은 속도로 돌았다

봄가을이 같은 속도로 돌아 주었다


솟아오름엔

바람의 관심 폭풍의 이름으로 관여했다

시속 6만 6천 킬로미터로 바깥을 달리고 안에서는 고요했다


계절을 건너고 너무도 가벼운 근원을 건너

빛이 발자국을 따라잡는 고단한 일상이지만

연착륙은 없었다

절정의 고요와 고요의 틈 사이

꽃 안에서 하루는 꽃 밖의 십 년이다

하루와 십 년 시차 속에서 겨울 별자리들

덩그러니 우주의 비밀이 되었다


착륙 순간 튕겨 오를 수 있는 홀씨에는

마음씨 좋은 지표면의 중력이 들어 있다


빛의 속도로 도착한 홀씨를 착륙시킨다

순간 볼트를 박는 뿌리들, 입사

우주까지 와서 취업을 했다

수습 기간도 없이 태양을 따라잡는 일을 시작한다

부서를 탐색하고 상사의 성향을 파악하며 뿌리내릴 궁리를 한다

아직은 빛보다 그늘에서 서성이지만

행성은 돌고 도는 것


채광창을 펼치고 암석 지대에서 노란 신호를 보낸다

민들레, 행성에서 유일한 구조물이 되었다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 문학수첩








오지로의 입문 - 조미희



자칭 씨는 매일 오지로 퇴근한다


사실 오지는 그리 멀지 않다

사람들은 세상 끝 어디쯤이 오지일 거로 생각하지만

자칭 씨는 그 대목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는다

오지는 바로 여기,

불가항력의 고통과 환상


자칭 씨는 사실 매번 길을 잃는다

오지란 그런 곳, 내 지적도에 없는

완전히 빠져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땅

언제 사라질지 모를 지붕과 대문의 주소

결심처럼 바짝 밀어 올린 뒤통수

벽과 벽을 밀며 자란 왕성한 야생성

이자와 실직과 월세의 나무줄기를 잡고

곡예를 한다

자칭 씨는 아슬아슬

멍으로 퍼져 간다


오지는 계속 무너지고 노랗게 추락해 바스러지는 얼굴 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재건축이라는 공룡과 건물주라는 신

공룡은 오랜 시간 오지를 주무르다 조금씩 먹어 치운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잔인하게 자칭 씨의 손에 칼을 쥐여 준다


내일은 계시가 내려오는 만기일

자칭 씨는 생각한다

문명에서의 오지는 도심 한복판에 있다고


오늘부터 자칭에서 타칭이 된다






*시인의 말


시를 만나서 좋았다.

가끔은 내 시가 멋질까. 못났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와 만나는 시간이 나는 좋다. 늘

시는 길거리에 앉아 있기도, 뛰어가기도, 울고 있기도 했다.

아무리 멋지게 감추려 해도 결국 시는 나다.


그래서 좋다. 부끄럽지만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시 속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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