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 가다 - 김인자

마루안 2020. 7. 17. 19:52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 가다 - 김인자


태초에 성전처럼
곱고 순결한 처녀였다
무슨 연유로 집을 나와
험한 산속에서 몸을 파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과도한 향기가 부른 참사일까
함박꽃에는 유독 벌레가 많이 꼬인다
그런 그녀도 피해갈 수 없는 건 시간
순결할수록 때는 쉬이 타기 마련
비밀처럼 세상에 왔다가
피는가 싶으면 어느새 홀로 흐느끼다 시드는 꽃
바닥에 널부러진 터무니없는 추레함
한때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함백이, 함막이, 옥란, 산목단, 천여화,
산목란, 목란으로 개명도 해봤지만
향기만은 어찌해 볼 수 없었을 그녀
어떤 이름보다 함박꽃이라는 이름을 애정했던 나는
7월 어느 날 그녀가 면사포를 벗고
홀연히 사라진 후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 되면
골짜기가 그녀의 향기로 흥건하다는 소문은
빈 하늘 아래 전설처럼 나를 유혹하지만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슬픈 꽃 개망초 - 김인자


노예의 피가 흘러 아프고 슬픈 꽃이다
얼핏 보면 천하나
자세히 보면 사랑스럽고 모여 있으면 우아하다
개망초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알고 나면
참을 수 없이 슬픈 꽃이 된다
걸음마를 배우기 전에
흔들리는 것부터 배웠으리라
밟히더라도 뿌리만큼은
함부로 뽑히지 않는 근성을 익혔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흩어지지 말자며
서로의 어깨를 도닥였으리라
하찮다 손가락질하거나 말거나
없는 듯 있는 존재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눈부시다는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제대로 솟구치진 못하더라도
바람을 타는 기술을 배웠기에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
먼 아시아까지 올 수 있었던 게지
검은 피부가 한이었으므로
신으로부터 특별 명으로 흰색이 된 꽃
이름이 싫지 않냐니
개망초가 어때서? 라고 반문한다
슬퍼서 아름다운 꽃이 어디 개망초뿐이랴
가끔은 꽃 앞에서
사람인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는데
개망초가 그렇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상회 - 김요아킴  (0) 2020.07.18
나무에 걸린 은유 - 전영관  (0) 2020.07.18
비석의 출구 - 김성장  (0) 2020.07.17
수의 - 백무산  (0) 2020.07.17
검은 넥타이 - 정일남  (0) 2020.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