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검은 악보 - 박은영

마루안 2020. 7. 16. 21:55

 

 

검은 악보 - 박은영

 

 

우주가 검은 건 어둠이 아니라고 하지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부터 콩자반을 좋아했다

머리가 흰,

동네 할아버지들이 무서워 마디 밖으로 다녔지

종이와 눈사람과 가루약이 없는 세상에서

검은 옷을 입고 살았다면,

이라고 쓸 적마다 연필심은 부러지고

나는 혼자 발톱을 깎았다

 

그것은 그림자를 자라나게 하는 일

 

흑조를 보고 온 날

마스카라를 사고 까만 눈물을 갖게 되었다

흑해는 아주 먼 바다였지

세계지도를 펼쳐 흑채 한 통을 뿌리면

겨울비가 내렸다

아스팔트는 상습적으로 얼었고

그늘진 당신이 블랙아이스를 조심하라고 했지

 

말은 깊을수록 검은색을 띠지

 

까마귀가 되고 싶은 밤들

간혹, 눈을 감고 점이 되기도 했지만

먹물은 차지 않았다

우주는

인간의 손으론 칠 수 없는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손가락이 백 개였다면 어땠을까

 

블랙리스트에 올랐겠지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실천문학사

 

 

 

 

 

 

달동네 - 박은영

 

 

한여름의 골목,

 

비 소식이 있었지만 손님은 오지 않았다

 

비처럼 마른 아이가 제 키만 한 우산을 가지고 층계를 내려가는 이 풍진세상(風塵世上), 선풍기 바람이 뜨거웠다 새 신자 전도용으로 받은 화초는 여름이 오기 전에 말라 죽었고 화분의 흙은 가벼워졌다 그날의 날씨에 따라 저울 눈금은 무게를 달리 측정했다

 

빈 쟁반,

 

먹을 게 없어서 국수를 삶았다 햇빛을 등지고 우려낸 멸치를 길고양이에게 주었다 멸치 똥이 말라가는 달동네, 달은 신도시의 소유, 분리수거함에서 주워온 플라스틱 컵에 조화를 꽂아두었다

 

수도세 독촉장이 나왔다

 

 

 

 

# 박은영 시인은 1977년 전남 강진 출생으로 한국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와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어 등단했다.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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