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검은 넥타이 - 정일남

마루안 2020. 7. 17. 19:09

 

 

검은 넥타이 - 정일남

 

나이 먹으면서 검은 넥타이 맬 때가 늘어났다

목에 검은 끈을 매고 집을 나서면

'아저씨, 누구 문상 가사나요'

'그래요, 요단강 나루에 앉아 물 구경하다 올 거요’

 

공중에서 까마귀가 운다

이상(李箱)은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고 했던가

저승 대합실에 들러 장부에 이름 적고

검은 넥타이가 검은 넥타이를 맞아 인사하고

망자에 대해 얘기하다 밥 먹고 돌아온다

 

아들들에게 부탁한다

내 가게 되면 검은 넥타이 매지 말라

붉은 장미꽃을 가슴에 달아라

 

 

*시집/ 금지구역 침입자/ 넓은마루

 

 

 

 

 

 

우는 소리 - 정일남

 

 

부산에서 제주로 가는 카페리호 선상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며

여보게 친구들 남은 인생 잘 살아보시게 나 먼저 가네

그렇게 떠난 시인이 있었다

 

달은 여울을 건너며 울고

날짐승 떼도 행렬을 이뤄 건너가는데

독성의 미세 물질로 숨이 가빠지니

그대가 간 무진으로 가고 싶어

떫은 생을 탕진한 시간

이승은 징역 사는 것과 같다

 

밤의 달빛 창가 탄금 소리 흐느끼니

장방형 관(棺)에 영혼은 없고

길에 가랑잎 구르는데

풀숲 여치 우는 소리 껴안는다

 

 

 

 

# 정일남 시인은 1935년 강원 삼척 출생으로 관동대 상학과를 중퇴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당선, 198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갱 속에서>, <들풀의 저항>, <야윈 손이 낙엽을 줍네>,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 <추일 풍경>, <유배지로 가는 길>, <꿈의 노래>, <훈장>, <봄 들에서>, <감옥의 시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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