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석의 출구 - 김성장

마루안 2020. 7. 17. 19:28

 

 

비석의 출구 - 김성장

 

 

지킬 것 없는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유목의 보폭으로 걸으며 일일이 응대해주기는 싫었지만
나를 가로막는 저 돌의 완고함을 잠시 들여다본다


이미 빈집들만 산다 하는데
비석만 남아 암석을 쥐고 단단해지는 고집이라니


통행증을 요구하듯 위엄을 보이려 하고
사각의 권력은 직선으로 뻗었지만
문장에는 오류가 있었고 변방의 글씨들이
대개 그렇듯 과욕이 획을 지치게 하고 있었다


아마 문(文)을 만든 자와 필(筆)을 다룬 자가 달랐으리라
주어를 놓치지 않으려 머리를 조아린 채 종종거리다보니
서술어는 자신이 비문 밖으로 나가는 줄도 모른다


하긴 어느 시인이 마을에 관여하고 싶으랴 음각의 시간을
파낸 석공도 피로한 망치를 베고 서둘러 잠들었으리라


돌을 세우던 근육들은 허기를 찾아 떠나고
골목길 대문은 기울었으나 담 넘어
허황은 아직 다 허물어지지 않았다


유랑의 힘을 모아 뒷산에 성을 쌓고
정착을 다스린 날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산둥반도의 돌들이 서해를 건너오는 탈주의 시대


어떤 유목이 다시 이진법의 원성들을 이끌어 이번에는
하나씩 마을을 떠날 때 거기 누가 문장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마차를 세웠겠는가 가첨석 아래
근대의 거미가 짐짓, 형용사를 가리고 있다

 

 

*시집/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걷는사람

 

 

 

 

 


무덤과 술병 - 김성장

 

 

이제 막 장례를 치른 무덤에서
묘비명이 반쯤 흙에 묻힌 무덤까지
잔디가 예쁘게 자란 무덤에서
참나무가 불쑥 솟구쳐 오른 무덤까지
숲의 입구에서 날망에 이르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생애를 만나고
한 가문의 영광과 쇠락을 만나고
한 나라의 건설과 멸망을 더듬어보게 된다
생각은 제멋대로 자라 허무허무하다가
나약한 숙명론에 이르곤 하지만
그것은 거울처럼 나의 먼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의 발길을 붙잡고 한참을 놔주지 않는 것은
이런 경우이다
잡초가 무성하여 이제는
잊히고 버려진 줄로만 알았던 무덤에
어느 날 문득 놓여진 소주병과 술잔
여리디여린 조팝꽃 세 가지를 꺾어다
잡풀 사이에 고요히 내려다 놓은 것
무덤인지도 확실치 않은 저 흙더미를 향하여
반쯤 남겨진 술병과 조팝꽃 말이다

 

 

 

 

# 김성장 시인은 1988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서로 다른 두 자리>가 있다. 이번 시집은 등단 25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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