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마루안 2022. 7. 17. 21:36

 

 

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그동안 먹었던 과일 하나도

실은 얼마나 숱한 다른 도사리들의 희생과 헌납이

깊이 떠받들어진 것이었는지

 

간 봄날 쏟아져 나와 천지를 꽉 매웠던

그렇게 잠시 공중에 우르르 몰려나와 얼굴 붉히던 복사꽃들 지고

꽃자리마다 만원 전동차 안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작은 열매들

나는 그걸 솎아 준다고

나뭇가지에 성상(性狀) 좋은 놈 한둘 남기고 다 훑어 내린다.

그래도 결실 떠안을 놈만은 악착같이 움켜쥐고 매달린다.

그 풋열매는 떠맡은 그대로 이내 제 곳간을 열어 햇볕과 바람

그리고 끝내는 이 건곤마저 들여 쌓겠지.

 

올해도 잘 익은 복숭아 몇 알의 채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익지 못할 풋실과들이 죽어야 했는지

솎임을 당해 붕락했는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낙과를 보며 - 홍신선

 

 

완강한 집착들도 꼭지 물러지면 제풀에 툭툭 떨어진다.

옆 것들에게 자리 내준다고

자신을 내려놓는다고

열매들 채 익기 전 앞서거니 뒤서거니 낙하한다.

더 이상 살 시린 비바람이나 성근 햇볕에 그리움도 관심도 없다고

등 돌리고 나면

세월도 그렇게 나를 이 세상 밖으로

꼭지 무른 듯 슬몃 내려놓을까

 

간밤 내내 내 잠의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지면

원래(遠雷) 몇 수(首) 듣더니

허공과 면벽 중인 터앝 복숭아나무

과연 그 밑에 해탈한 낙과들 때 없이 편안하게 뒹굴고 있다.

 

 

 

 

#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직박구리의 봄노래>, <가을 근방 가재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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