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솎으며 - 홍신선
그동안 먹었던 과일 하나도
실은 얼마나 숱한 다른 도사리들의 희생과 헌납이
깊이 떠받들어진 것이었는지
간 봄날 쏟아져 나와 천지를 꽉 매웠던
그렇게 잠시 공중에 우르르 몰려나와 얼굴 붉히던 복사꽃들 지고
꽃자리마다 만원 전동차 안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작은 열매들
나는 그걸 솎아 준다고
나뭇가지에 성상(性狀) 좋은 놈 한둘 남기고 다 훑어 내린다.
그래도 결실 떠안을 놈만은 악착같이 움켜쥐고 매달린다.
그 풋열매는 떠맡은 그대로 이내 제 곳간을 열어 햇볕과 바람
그리고 끝내는 이 건곤마저 들여 쌓겠지.
올해도 잘 익은 복숭아 몇 알의 채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익지 못할 풋실과들이 죽어야 했는지
솎임을 당해 붕락했는지.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낙과를 보며 - 홍신선
완강한 집착들도 꼭지 물러지면 제풀에 툭툭 떨어진다.
옆 것들에게 자리 내준다고
자신을 내려놓는다고
열매들 채 익기 전 앞서거니 뒤서거니 낙하한다.
더 이상 살 시린 비바람이나 성근 햇볕에 그리움도 관심도 없다고
등 돌리고 나면
세월도 그렇게 나를 이 세상 밖으로
꼭지 무른 듯 슬몃 내려놓을까
간밤 내내 내 잠의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지면
원래(遠雷) 몇 수(首) 듣더니
허공과 면벽 중인 터앝 복숭아나무
과연 그 밑에 해탈한 낙과들 때 없이 편안하게 뒹굴고 있다.
#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찍다>, <직박구리의 봄노래>, <가을 근방 가재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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