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조용한 삶의 정물화 - 문광훈

손에 잡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간 책이다. 저자의 빼어난 문장력 덕분에 술술 읽힌 덕이다. 그렇다고 추리소설 읽듯이 줄거리만 따라 간 것은 아니다. 그의 문장은 예술적 체험에서 나오는 깊은 사유가 들어 있기에 조용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두 번씩 읽은 대목도 여럿 있다. 그래도 복숭아 먹고 난 후에 손가락에 남은 향기처럼 여운이 여전하다. 그만큼 그의 문장은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질투심을 유발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살지만 저자의 예술적 일상은 모방하고 싶다. 문광훈 선생이 유명 작가는 아니다. 거기다 책을 낸 출판사도 생소하다. 그러나 책 내용은 쉬이 단물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알차다. 라는 제목도 시적이어서 좋다. 저자의 소박하지만 풍성한 일상과 아주 어울린다. 이런 책은 신..

네줄 冊 2018.10.18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 강창래

이 책은 인문학자 강창래가 암 투병중인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하며 써내려간 메모들을 엮은 책이다. 강창래 선생과 출판사 대표인 아내 정혜인은 동갑내기 부부다. 35년을 함께 살다 어느 날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병색이 깊어지자 아내의 부탁으로 그녀를 위한 요리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한국 남성이 그렇듯 라면만 겨우 끓일 줄 알았던 남자가 요리사로 변신하는 과정이 꼼꼼하게 적혔다.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이걸 계기로 가족과 인생의 소중함도 절실하게 깨닫는다. 많은 부분에 레시피와 설명이 달려서 남자를 위한 요리책이라 해도 되겠다. 동갑내기 부부로 알콩달콩 친구처럼 살아왔지만 이별을 예감하고부터 남편은 암 투병을 하는 아내에게 하나라도 먹이려고 환자식을 선택하고 아내는 자신이 죽고 나면 혼자 남을 남편..

네줄 冊 2018.10.06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 심재휘 시집

이번 연휴 며칠 간의 여행길에 줄곧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시집이다. 얼마전에 구입한 몇 권의 시집 중 단연 빼어난 시집이어서 망설임 없이 배낭에 넣었다. 버스에서, 숙소에서,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터미널 대합실에서 반복해서 읽었다. 몇 편의 시는 서너 번씩 읽었을 것이다. 요즘에 나온 시집 중에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여러 번 읽고 싶은 시집이 몇 권이나 될까. 갈수록 좋은 시집을 만나기 힘든 시대다. 독자와의 소통보다 당선되기 위해서나 아니면 상을 타려는 목적인지 평론가들 눈에 들기 위해 쓰다 보니 도무지 뭔 소린지를 모르겠는 시가 지천이다. 심재휘의 시는 일단 이해하기 쉽다. 탈고를 거듭해 긴 시간 다듬어진 싯구들이 잘 숙성되어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최신 유행의 언어보다 지난 세월을 잘 견뎌낸..

네줄 冊 2018.09.29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 박대근

독특한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서점엘 갔다가 제목에 집어들어 몇 장 들추면서 결정했다.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은 짧은 순간이었다. 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매일 밟고 다니는 것이 보도블록 아니던가. 내 발바닥과 가장 가까운 것도 보도블록이다. 내가 보도블록에 관심이라곤 기껏 해마다 멀쩡한 벽돌을 뜯어내고 새로 까는 작업을 반복한다는 신문기사 정도였다. 예산을 미처 소진하지 못하면 이듬해 그만큼 자치단체 예산이 깎이기 때문에 일단 돈을 전부 쓰고 보자는 생각에 그런 작업을 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서울기술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도로 포장 전문가 박대근 박사가 쓴 책이다. 실제 서울시 도로담당 공무원으로 10년간 일한 공무원 출신으로 이쪽 분야 전문가다. 아마도 도심 인도에 관한 책은 처음이지 싶다. ..

네줄 冊 2018.09.28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 이설야 시집

이설야는 첫 시집부터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시인이다. 이름부터가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처럼 들린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남자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폭포 아래서 무예를 닦고 여자는 남자를 기다린다. 그 세월이 근 10년이다. 시집은 제목부터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요즘 시집답지 않게 아주 서정적인 제목이다. 다소 무겁지만 이런 시집은 제목이 시집다워서 좋다. 요즘 영화든 책이든 일단 튀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한심한 제목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니면 잘 팔리는 책과 혼동하기 쉽도록 적당히 닮은 이름을 지어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화끈하게 튀거나 잘 팔리는 말랑말랑한 제목에 적당히 묻어 가거나다. 책장사도 먹고 살아야겠지만 내용과 전혀 부합되지 않고 정체성까지 혼란스럽게 하는 제목은 삼..

네줄 冊 2018.09.16

맛의 배신 - 유진규

이 책을 통해 진짜 맛에 대한 배신을 제대로 알았다. 내가 먹은 음식이 모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심코 먹는 음식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데 오늘은 한 끼 정도 가볍게 먹고 이 책에 집중해 볼 일이다. 바나나 우유에는 바나나가 몇 개쯤 들어 갔을까. 딸기 우유에는 딸기가 몇 개쯤 들었는가. 100% 오렌지 주스 한 잔에는 오렌지가 두 개쯤은 들어갔겠지. 결과는 아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 없다. 모두 인공적으로 만든 가짜 향으로 맛을 낸다. 이쯤 되면 음식의 배신이라 해도 되겠으나 우리는 매일 수십 가지의 인공향을 입으로 넣고 있다. 저자는 SBS, EBS 등에서 활약한 환경 다큐 전문 PD였다. 중년이 되면서 배가 나오는..

네줄 冊 2018.09.12

헌법의 약속 - 에드윈 캐머런

언제부턴가 우리는 법관을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가 아니라 애초부터 그랬는지 모른다. 그래서 노회찬 의원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게 아니라 만명에게만 평등하다고 했을 것이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구나 하는 말이 있다. 그렇다. 그런 법이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요즘 헌법에 관한 책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책장사들도 때를 만난 것이다. 가능하면 읽어보려고 하는데 절반 이상이 수준 미달의 책이다. 책을 쓴 사람들 중 서울대 출신이 많아서 그런가. 자기 학력 자랑과 공부 잘 한 것을 빼면 알맹이가 없다. 어디서 베낀 것처럼 느껴지는 생명력 없는 문장도 많다. 본인이 머리가 좋아 많이 아는 것과 독자에게 전달하는 글솜씨는 분명 다르다. ..

네줄 冊 2018.09.10

울지도 못했다 - 김중식 시집

잊고 있었던 김중식 시인이 오랜만에 시집을 냈다. 한때는 표지가 닿도록 꽤나 열심히 그의 시를 읽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 읽는 시집이란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틈틈이 꺼내 몇 번씩 반복해서 읽는 시집이다. 나는 지금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대신 시집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 왕성한 예술 활동을 하는 시인이라면 적어도 5년에서 10년 사이에 시집 한 권은 생산해야 독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본다. 나름 열심히 시를 읽고 있는 내가 보기에 올림픽 주기인 4년 터울이 가장 무난한 시집 생산 주기가 아닌가 한다. 거기다 조금 숨을 고르고 다듬을 시간을 보탠다면 5년에 한 권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모든 예술이 그렇겠으나 시라는 것도 써질 때는 폭풍처럼 시상이 떠오르다가도 안 써질 때는 몇 년씩 아무 진전이 없다고 ..

네줄 冊 2018.09.08

인생극장 - 노명우

사회학자 노명우는 학자라기보다 작가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학자가 열심히 공부해서 자기 걸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대중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글 쓰는 실력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문장력을 갖춰야 한다. 이점이 머리 좋은 판검사들이 명문대에서 부지런히 공부해 자신들의 출세만을 위해 승승장구하는 것과는 완전 다르다. 노명우는 이전 책에서부터 아주 쉬운 문장으로 대중들에게 사회학을 알려주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 책은 노명우 선생의 부모님 일생을 당시의 대중영화와 연결시켜 아주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부모님의 일대기이지 한국 현대문화사라 해도 되겠다. 몇 년전에 유시민이 자신의 55년 인생을 한국현대사로 묶어낸 흥미로운 책에 버금간다. 1920년대 생인 아버지와 1930년..

네줄 冊 2018.08.16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 김창균 시집

갈수록 좋은 시집 만나기가 쉽지 않다. 신간 시집은 쏟아지는데 보는 눈이 모자라서인가. 서점에 진열된 엄청난 양의 책 앞에서 막막해진다. 읽을 책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런 책을 누가 읽을까에 생각이 닿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무작정 들른 헌책방에서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 이 시집을 읽기까지 몰랐던 시인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시집이라는데 여태 내 눈에 띄지 않았다. 독자가 모르는 시인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고 그런 시인이려니, 별 기대 없이 몇 장 뒤적거리다가 내 눈을 끌어당기는 묘한 흡인력을 느꼈다. 아! 이 사람 괜찮은 시를 쓰는구나. 내가 전문적인 시 읽기는 못 했지만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어떤 촉을 감지했다. 단박에 내 마음을 관통한 이런 시집은 읽는 방식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아껴가면서 ..

네줄 冊 2018.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