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헌법의 약속 - 에드윈 캐머런

마루안 2018. 9. 10. 22:00

 

 

 

언제부턴가 우리는 법관을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가 아니라 애초부터 그랬는지 모른다. 그래서 노회찬 의원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게 아니라 만명에게만 평등하다고 했을 것이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구나 하는 말이 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렇다. 그런 법이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요즘 헌법에 관한 책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책장사들도 때를 만난 것이다. 가능하면 읽어보려고 하는데 절반 이상이 수준 미달의 책이다.

책을 쓴 사람들 중 서울대 출신이 많아서 그런가. 자기 학력 자랑과 공부 잘 한 것을 빼면 알맹이가 없다. 어디서 베낀 것처럼 느껴지는 생명력 없는 문장도 많다. 본인이 머리가 좋아 많이 아는 것과 독자에게 전달하는 글솜씨는 분명 다르다.

그들에게 감히 충고하건데 그냥 시험 잘 치러서 법관 되었고 학자 되었으니 거기서 만족 하시라. 독자들을 위한 책은 다른 재능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시고,, 책 이름은 대지 않겠으나 양아치 수준의 책도 있었다. 그것도 최고 대학을 나온 학자 분께서 썼다.

각설하고, <헌법의 약속>에 관한 책 이야기를 하자.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동성애자인 최고법원 판사가 있다. 거기다 흔히 에이즈라고 말하는 HIV 감염자다. 그런 사람이 법관들의 최고 자리에 앉아 있다. 1994년 12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HIV 감염인이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에드윈 캐머런(Edwin Cameron)을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우리나라에서 HIV 감염인이자 동성애자가 대법관 후보로 임명 된다면 어떻게 될까? 국회 청문회를 통과하지도 못하겠지만 그걸 임명한 지도자까지 싸잡아 탄핵감이라고 들고 일어날 것이다. 어쨌든 남아공에서는 만델라라는 위대한 정치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캐머런은 2009년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반대파는 있게 마련이라 아무리 대통령의 신임이 있어도 그가 걷는 길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런 악조건에서 그는 판결을 통해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약자들과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남아공에서 법관이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쓴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일생이 때론 역사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까. 원래 법 이야기가 재미 없고 딱딱해서 속도감 있게 읽히지는 않지만 불우한 환경을 딛고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투쟁의 기록이 담담하게 적혀있다.

캐머런은 195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 기사였는데 알콜 중독에다 건달인 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은 늘 이사를 걱정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되고 캐머런이 일곱 살 되던 무렵 큰누나가 사고로 죽는다. 아버지는 큰딸의 장례식에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아 참석했다.

이후 캐머런은 어머니를 떠나 몇 해 동안 작은누나와 아동보호기관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악조건에도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그가 백인이라는 것이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아공에서 그가 흑인이었다면 지금의 캐머런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성장하던 시기에 남아공은 극심한 인종차별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넬슨 만델라도 감옥에 있었는데 세계 최장 기간 수감된 정치범으로 세계인들이 안타까워했다. 포기하지 않는 자가 이긴다고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었고 인종 차별을 종식 시켰다.

캐머런이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을 압축한 문구는 이렇다. <헌법은 기본 구조상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며, 사회경제적 권력이 없는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라고 명한다. 이는 옳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가 허울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자보다 약자를 향한 그의 시선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아픔을 딛고 민주화를 이룬 남아공의 헌법 전문은 이렇다. <우리 남아프리카인은 과거의 불의를 인정하고, 우리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고통을 당한 이들을 기리며, 우리나라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남아프리카가 이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이에게 속하며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믿는다>.

이 책의 번역은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가 했다. 역자 후기에서 밝힌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경위가 인상적이다. 2014년 남아공 헌법재판소를 방문하는 길에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요하네스버그 공항 서점에 진열돼 있던 이 책을 주면서 번역을 권했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보기 드물게 김이수 재판관은 진보적 학자였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헌재소장 직무 대행을 하던 김이수 재판관은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되었지만 곡절 끝에 국회 청문회를 거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서 그는 헌재소장이 되지 못했다. 당시의 안타까움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