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 - 박대근

마루안 2018. 9. 28. 22:11

 

 

 

독특한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서점엘 갔다가 제목에 집어들어 몇 장 들추면서 결정했다.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은 짧은 순간이었다. 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매일 밟고 다니는 것이 보도블록 아니던가. 내 발바닥과 가장 가까운 것도 보도블록이다.

내가 보도블록에 관심이라곤 기껏 해마다 멀쩡한 벽돌을 뜯어내고 새로 까는 작업을 반복한다는 신문기사 정도였다. 예산을 미처 소진하지 못하면 이듬해 그만큼 자치단체 예산이 깎이기 때문에 일단 돈을 전부 쓰고 보자는 생각에 그런 작업을 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서울기술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도로 포장 전문가 박대근 박사가 쓴 책이다. 실제 서울시 도로담당 공무원으로 10년간 일한 공무원 출신으로 이쪽 분야 전문가다. 아마도 도심 인도에 관한 책은 처음이지 싶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동안 공무원과 보도블록 업자들이 많이 해먹었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지은이가 공무원 시절에 목격한 보도블록 공사 실태는 우리나라 건설 산업의 적폐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입찰 담합과 돌려먹기, 원청-하청-재하청까지 줄줄이 이름만 빌려주고 커미션 챙기기, 부실한 현장 감리가 얽히고 설킨 거대한 카르텔은 지금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단다.

시민들이 먹고 살기 바빠서 보도블록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를 틈다 관계 공무원과 업자들만 배를 불린 것이다. 실제 보도블록이 견고하지 못하고 금방 깨지거나 평면이 고르지 않고 금방 틈이 벌어지는 것을 자주 본다. 포장 공사 때 전문가의 감수를 받고 작업을 해야지만 형식만 갖출 뿐 그냥 동네 노가다 아저씨 데려다 공사를 맡긴단다.

거기서 떨어지는 콩고물은 관계 공무원과 업자들이 꿀꺽하는데 어느 시민이 이런 것을 알 수 있을까. 이런 불편한 부분을 저자는 실제 경험담과 연구를 통해 꼼꼼하게 짚고 있다. 정권 바뀌고 혁신을 위한 정부 노력에 찬물을 끼얻으며 곳곳에서 저항하는 세력이 있는 분야도 공무원 사회다.

어딘들 부패 세력이 없을까마는 적폐 청산은 공무원 사회도 수두룩하다. 많은 시민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저자는 공무원 생활 중에 여러 번 방문해 연구한 일본의 보도블록 사례를 언급한다. 허술한 우리와 달리 일본의 견고하고 꼼꼼한 보도블록 작업을 사진으로 비교하며 보여준다.

내 어릴 적에 종종 어른들이 한 말이 있다. 마을 앞 신작로에 있는 수문을 왜놈들이 만들었는데 지금도 말짱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조선놈이 만들었으면 벌써 내려앉았을 거라 했다. 어른들은 일본을 왜놈이라 미워하면서도 실력은 인정했다.

군대에서의 폭력이나 관료사회의 경직성이 일제의 잔재라고 한다. 그것이 정말 일제의 잔재라면 우리는 왜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좋은 점은 배우지 않고 나쁜 일만 배웠을까. 내가 세 번 가본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머문 날짜를 전부 합해야 20일이 안 되지만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도 없고 친절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나 거리를 걸을 때,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여러 명이 함께 쓰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궁리하는 사람들 같았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깔끔함이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는데 부패 세력이 발 붙일 곳이 있겠는가.

저자는 우리의 보도블록 품질이 형편 없는 것이 업자들이 품질로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각종 접대와 학연 지연 등 끈을 앞세워 담당 공무원만 연결하면 되는데 품질 향상에 노력 하겠는가. 초코파이도 라면도 프라이팬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기업들은 끊임 없이 맛과 품질 개선을 연구한다.

매일 걸어야 하는 길이 움푹 파이거나 벌어지고 깨진 인도를 걸으면서 그냥 지나갈 게 아니다. 이 도로 담당이 어느 구청 누군지 관심을 보인다면 움푹 패여 기울어진 인도를 걷거나 보도블록 사이에 하이힐이 끼어 낭패를 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보도블록은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