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 정연철

마루안 2021. 4. 19. 19:27

 

 

 

시는 가슴에 작은 냇물을 만든다. 내 속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들을 냇물에 실어 보내자 시가 온몸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뻗어 나간다. 마음에 동요가 인다.

 

열 일곱 살 소년이 기형도 시를 읽으며 이런 감정을 느낀다. 나는 스물 일곱에도 천방지축 노느라 잘 몰랐던 시를 소년은 자기 가슴에 온전히 담을 줄 안다. 방과 후 물기를 한껏 머금은 숲길을 걸으며 이런 시를 쓴다.

 

우울의 심연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비 오는 날,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나무들, 혼돈희 틈을 타

은밀하고

용의주도하게

눈물을 흘려 보낸다

 

저 눈물 소진하고 나면

햇살에 반짝, 자체 발광하겠지

그렇다면 나 지금

지체 없이 울어야 할 때

 

실제 소년은 자주 운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가 생각나서다. 엄마가 보고 싶고 미안해서다. 소년은 외할머니와 엄마가 전부인 줄 알고 여태껏 살았다. 잊힐 만하면 바람처럼 왔다가 떠나는 아버지는 없는 거나 진배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돌아 왔다. 소년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말문을 닫는다. 아버지가 아니라 H라고 부른다. 엄마 장례 후에 H는 고향으로 이사를 간다. 소년도 학교에서 사고를 친 후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간다. 

 

경상도 소읍이다. 그곳에서 투포환 선수인 은혜라는 학생을 만나고, 학교 문예반에도 들어간다. H는 고향집을 수리해서 카페를 차린다. 소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여전하다. 늘 집 밖을 떠돌고 복수심에 가출도 감행한다.

 

이런 일상에서 소년을 지탱하게 해 준 것은 시다. 소년은 시를 읽을 때만 세상이 아름답다. 기형도, 백석, 윤동주, 파블로 네루다 등의 시를 읽으며 소년은 시심을 기른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엄마와 대화를 하던 소년은 이렇게 자신을 진단한다.

 

<나는 자발적 외톨이였고 이제 그건 목이 늘어진 티나 삼선슬리퍼처럼 익숙하다. 마치 외로움과 일심동체가 된 기분, 나는 외로움과 시와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 혼자가 아니었다면 시가 나에게 다가왔을까? 내가 시를 맞이했을까?>

 

어느 날 동네 할머니에게 아버지의 과거를 듣는다. H는 시에 재능이 있어 일찍 등단까지 한 시인 지망생이었다. 엄청난 사건 후유증과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가 왜 가족을 팽개친 채 세상을 떠돌아만 했는지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저자인 정연철의 자전적 정서가 투영되었다.

 

실제 여러 책을 쓴 작가이자 동시를 쓰는 시인이다. 지금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연둣빛 숲속에 햇살 가득한 오월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성장통을 겪는 열일곱 살 소년의 성장 소설이자 가장 외롭고 힘든 순간에 찾아온 시에 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