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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 김재덕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 김재덕 어금니 하나를 또 뽑았습니다. 오래 흔들리던 놈 아프게 버티다 슬그머니 뿌리를 놓더군요. 지난 몇 년 열 몇 개 시간이 뽑히고 볼트가 박혔습니다. 지나간 사랑처럼 몇몇의 내가 가고 녹슬지 않는 타인이 나를 지키는 셈이지요. 어금니들은 내 손으로 다 뽑았습니다. 아픔을 진통제로 달래고 기다리다 제 발로 일어설 때 헤어졌지요. 헤어지니 아픔도 사라졌지만 떠난 자리는 늘 깊더군요. 오래 참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싶었습니다. 작약 몇 송이 저뭅니다. 붉은 잎 이지러지고 발 아래 먼저 떠난 봄들 낭자하네요. 다들 그렇게 떠나나 봅니다. 단단한 것들을 앞세워 보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갑니다. 먼저 떠난 것들이 조금씩 떠나오는 나를 보겠죠. 단단한 눈빛으로. 떠..

한줄 詩 2022.08.23

나는 잘 있습니다 - 하상만

나는 잘 있습니다 - 하상만 내가 쓴 글을 내가 읽고 내가 부른 노래를 녹음해서 듣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걸 여태 모르고 밖으로 나돌았다 혼자 있지 않아서 쓸쓸했던 거구나 혼자 있지 않아서 외로웠던 거구나 내가 쓴 글을 내가 읽고 내가 부른 노래를 다시 듣는다 혼자라서 행복하구나 *시집/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걷는사람 그분은 외로웠을 거예요 - 하상만 죽는 게 왜 두려울까 물었더니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네요. 매일 매일 살아본 경험만 있고, 죽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이상하게 살수록 살고 싶어져요. 그러다 보니 다시 한번 태어나 보고 싶기도 하고. I born이 아니라 I was born입니다. 태어난 게 아니고 태어나진 겁니다. 태어났다고 하니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책임이..

한줄 詩 2022.08.23

흙의 감정은 재현되지 않는다 - 이명선

흙의 감정은 재현되지 않는다 - 이명선 견디고 싶어서 한 사람의 고백을 듣기 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비를 기다리며 둥글어지는 땅의 체취처럼 장미가 붉어질수록 우리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처럼 어떤 고백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바라볼수록 침묵이 되어 돌아왔다 신열에 시달리는 당신의 독백을 짚어 보다가 우리는 뒤돌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헤어지는 날이 많았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당신의 영혼에 비가 비친다 알약을 녹이는 입 안에서 기도 소리를 들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을 한 옥타브씩 오르다 흙의 감정을 밟고 오른다는 미안함에 나는 흩어지고 하루가 하루를 다독이고 있는 건 부서지는 흙의 감정을 그러모으는 일 잘 배운 이별이 시야를 흐릴수록 꽃을 편애했던 당신..

한줄 詩 2022.08.21

이쪽저쪽 - 김석일

이쪽저쪽 - 김석일 자신의 나이는 까맣게 까먹고 죽음을 남의 일로 치부하는 참 철없는 중늙은이들이 욕심 꿈틀대는 희망을 나눈다 아파트값이 더 오를 것 같다고 고향 선산이 개발될 것 같다고 수입 영양제가 정말 좋은 것 같다고 못마땅한 친구가 삐딱하게 한마디 했다 — 야 그래봤자 십 년 이쪽저쪽이야 짜샤 의아하게 쳐다보는 화상들에게 덧붙였다 — 십 년 이쪽이면 80이고 저쪽이면 90이야 헛소리들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살아 십 년을 앞뒤로 헤아려보던 중늙은이들 멀뚱멀뚱 뿌연 눈동자를 굴린다 *시집/ 울컥하다는 말/ 북인 상처가 된 말 7 - 김석일 — 아무래도 나는 고독사를 하겠지! 슬픈 표정의 자조섞인 그의 말을 그냥 듣기만 하면 좋았을 걸 — 그럼 너 죽으면 호상이라도 치를 줄 알았냐? 술김에 농처럼 툭..

한줄 詩 2022.08.21

방향이 다를 뿐 - 이윤승

방향이 다를 뿐 - 이윤승 오래 씹을수록 좋다고 한다 좋은 침을 만들기 위해선 잘 씹어야 한다 씹지 않으면 이빨의 기능이 약화될 수도 있으니까 바람 불어와 나뭇잎 흔들린다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하는 친절한 당신 옆에서 흔들린다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려서 소처럼 되새김할 수 있는 네 개의 위장이 없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책을 보고 있다 씹을수록 건강해진다는 너머로 걸어간다 너머가 알 수 없어질 때마다 시작이 반이면 반은 읽은 것이라고 커피가 달지 않고 적당히 맛있다고 감정 빼고 말한다 뱉어내는 타액이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독이 되기 십상이어서 제대로 알고 적당히 씹어야 하고 씹을 걸 제대로 씹어야 한다 친절하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고 흰 구름이 안면에 홍조를 띠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발걸음을 떼며..

한줄 詩 2022.08.20

비로소 개 - 강시현

비로소 개 - 강시현 말로만 듣던 깍쟁이가 따로 없었다 아내의 벗이 여행 간 사이 며칠 맡아 달라고 보낸 그 녀석에게는 싱그럽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사람보다 더 비싼 이발을 하고 예방접종을 받고 더 자주 목욕하고 붙임성도 있다니 말쑥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은근히 경계심도 돋았다 몰티즈니 푸들이니 치와와니 하는 억세게 운 좋은 견공들은 고상하게 먹고 자고 똥 싸고 산단다 검둥이는 그늘이 흘러내리는 슬레이트 처마 밑에서 컹컹 짖으며 사람 똥도 먹고 마을 어귀에서 흘레도 붙다가 한여름 개장수에게 다리가 꺾인 채로 팔려 나갔다 그 돈으로 육성회비를 내고 공책도 샀다 검둥이는 문풍지처럼 떨며 가부좌를 틀고 떠났다 그 후로 습관성 탈골처럼 어떻게든 꺾인 활자를 읽으면 나는 몹시 아팠다 땀에 전 몸뚱아리와 생존에 밀려..

한줄 詩 2022.08.20

아내의 사촌에게 - 박판식

아내의 사촌에게 - 박판식 안 되는 것들에게 나는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얼음덩어리 같은 후회가 구덩이를 팠습니다 내 두 손이 나의 두 발이 그리워 복숭아뼈를 만졌습니다 허망한 것들이 비가 되어 내리다가 눈이 되어 흩날리더군요 호랑이, 호랑이들은 대개가 미남 미녀입니다 홍콩이라는 제목의 책을 다 읽고 뉴욕과 런던마저 정독하고 나서 실컷 울었습니다 슬픈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서 더 슬펐습니다 불행은 모두 현찰로 지불해야 한다고 불행을 만들다가 지친 아내의 사촌이 오늘은 슬픈 얼굴로 가정식 떡볶이를 만들어 줍니다 나이 마흔에 '나는 귀여운 아빠 딸' 티셔츠를 입고는 뭔가 미련을 못 버린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다 희망을 버려라 결심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결심입니다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

한줄 詩 2022.08.19

오래된 세균 - 조숙

오래된 세균 - 조숙 세계가 위험할수록 안전한 것을 찾는 비루한 하루 세균이 밀가루를 먹고 변화시킨 발효빵 효모가 쌀을 먹고 만들어낸 막걸리 시간을 오래 들여 세균이 남긴 것을 얻어먹는다 바이러스 매개체 인간이 되어 집안에 갇힌 채 효모가 먹걸리 만드는 소리를 들으면 속도와 팽창으로 무리 지어 내달리던 시간은 천천히 발효되어 생각 속으로 들어오고 오래된 세균처럼 무언가를 변화시켜 안전하게 하는 것 배 불리기 위해 비루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 것을 꿈꾸게 된다 *시집/ 문어의 사생활/ 연두출판사 몸 - 조숙 나이들수록 내 몸이 좋다 몸은 아직 움직이고 있다 몇 군데 원할하지 않지만 혼자 움직일 수 있다 아직은 따뜻하다 멀리 갈 수 있다 바람을 느끼고 걸을 수 있다 피부로 햇볕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먹고 ..

한줄 詩 2022.08.19

전쟁들, 하찮음을 깨닫는 순간 - 신동호

전쟁들, 하찮음을 깨닫는 순간 - 신동호 두번의 가을 이토록 많은 후손을 남겼는데, 가을까지 저지를 악행들을 생각하면 전쟁만큼 유용한 것은 없을 듯하다.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다다를 방법은 환상이다. 있다고 믿는 것, 자신이 만든 세계에 대한 돌연변이적 망각뿐이다. 아들의 정의 폭염에 가로막혀 가을까지 오고 말았다. 고통은 강제로 삭제되었다. 전쟁은 아들의 것, 전쟁은 미래의 것. 반항은 분명 잠이 덜 깼거나 배가 고픈 상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 패전은 오직 생존이다. 노인들의 기억 수많은 모욕과 패배 속에서 건진 단 하나 승리의 기억. 기억의 증폭과 확신. 존재란 그 하찮은 기억의 결과물이다. 노인은 정의의 기회를 포착하고 자기 시대의 정의를 구현하게 되었다. 승리하였다. *시집/ 그림자..

한줄 詩 2022.08.18

호박꽃 피던 날 - 황현중

호박꽃 피던 날 - 황현중 호박꽃 속 꿀벌 쌈 싸듯 잡아서 홰홰 팔 내두르며 삼심풀이 오후가 기울던 해거름 서울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날 보고 웃던 날 아부지, 아부지····· 오냐, 내 새끼····· 흠흠 서울 냄새 맡으며 주렁주렁 애호박처럼 매달리며 한 마리 서러운 꿀벌이 되어 어린 새끼는 잉잉 울고 호박꽃 속 꿀벌 쌈 싸듯 아버지가 날 안고 홰홰 팔 내두르면 어느새 내 슬픔은 기쁨으로 활짝 울 아부지 왔다! 이것 봐라, 울 아버지 서울서 왔다! 동네방네 자랑에 호박꽃은 넝쿨지고 아버지는 새 구두에 뒷짐 진 채 아직 오지 않은 생선 장수 어머니를 마중 나가시고 *시집/ 구석이 좋을 때/ 한국문연 아버지 냄새 - 황현중 나는 뒤끝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뒷간에 일 보러 갔다가 향기로..

한줄 詩 2022.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