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잎 위에서 자란 바람에게 - 박주하

마루안 2021. 8. 16. 19:23

 

 

꽃잎 위에서 자란 바람에게 - 박주하


오늘은 또 어떤 마음으로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너는 장미의 심장을 찢는 법부터 배웠구나

어제의 얼룩을 지우지도 못했는데 오늘 주고받은 수치심들이 어둠에 물들어 갑니다

우리가 배운 가혹한 말들은 심장에서 나왔으나 돌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돌아가도 붉은 꽃을 피울 여유는 없겠지만 하나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 죄는 상한 여름밤을 지나갑니다

거리는 이미 낡아 버렸고 도처에 자신을 끌고 가는 발소리들이 낯설어지는 이곳

한없는 마음의 겹이 타올랐던 것인데 왜 우리는 늘 서로 다른 말을 듣는 걸까요

당신의 날들은 후회하지 않으려고 돌아갔지만

기억은 처음으로 돌아와 매번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앞으로 열 걸음, 뒤로 열 걸음 매일 십자가가 열리는 여름밤

오직 십자가만 보이는 창가에서 가지런히 슬픔을 포개고 갱생 중입니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완연(完緣) - 박주하

 

 

얼굴에 붕대를 감은 불상 앞에서 살며시 이마를 낮추는 꽃잎을 보았습니다

점안을 기다리는 부처를 향해 절을 올리는 꽃잎의 발그레한 귀 언저리를 본 듯도 합니다

 

법당 앞을 서성이던 바람 한 줄기가 꽃잎의 손을 붙잡고 길을 나서니

저 바람은 어느 먼 곳에서 돌아온 소식일까요

 

아슬아슬 언덕을 내려가는 꽃잎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배롱나무

제 몸을 떠나간 인연들과 나눈 소회가 마당 가득 붉게 번졌습니다

 

배롱꽃의 이별은 배롱나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일

오래전에 싹이 트고 자라 온 인연이 간신히 뜻을 이루고 생의 거처를 옮겨 가는 일

우연히 강이나 한번 보자고 바람을 따라나선 건 아닐 겁니다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모든 그리움도 태어나기 전부터 조각된 작디작은 꽃잎 같은 일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으니 어쩌면 꽃보다 못한 마음이겠으나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서 시작된 인연을 마침내 완성하는 것이라고

 

미련이 바닥에 내려와 닿기까지 마음은 끝끝내 생각을 세워 둡니다

 

 

 

 

# 박주하 시인은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96년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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