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내의 사촌에게 - 박판식

마루안 2022. 8. 19. 22:20

 

 

아내의 사촌에게 - 박판식

 

 

안 되는 것들에게 나는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얼음덩어리 같은 후회가 구덩이를 팠습니다

내 두 손이 나의 두 발이 그리워 복숭아뼈를 만졌습니다

 

허망한 것들이 비가 되어 내리다가

눈이 되어 흩날리더군요

 

호랑이, 호랑이들은 대개가 미남 미녀입니다

홍콩이라는 제목의 책을 다 읽고 뉴욕과 런던마저 정독하고 나서

실컷 울었습니다

슬픈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서 더 슬펐습니다

 

불행은 모두 현찰로 지불해야 한다고

불행을 만들다가 지친 아내의 사촌이 오늘은 슬픈 얼굴로

가정식 떡볶이를 만들어 줍니다

나이 마흔에 '나는 귀여운 아빠 딸' 티셔츠를 입고는

뭔가 미련을 못 버린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다

 

희망을 버려라

결심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결심입니다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객관적으로 - 박판식

 

 

사랑, 그건 순수한 낭비라고 해야겠죠, 어쩐지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기분 때문에 사촌은 자꾸만 바보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때야말로 참으로 행복했다는 말을 들려주려

외숙모가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네요

 

물론 끝을 잘 맺어야 명백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어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던 시절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호르몬 주사 얘기를 꺼내는 그이가 또 이상한 말을 하네요

 

부자가 되었을 때조차도 난 부자가 아니었던 것 같애

난 그냥 늘 새로워지고 싶었어 죽을 때까지

 

부모의 기대대로 풀렸으면 두 번쯤은 대기업에 들어갔을 거고

결혼도 좋은 여자랑 한 세 번쯤은 이미 했을 사촌이

새벽 세시에 또 초인종을 누르네요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일까, 울먹이며

올 일은 결국 오고야 말지요

교복 입은 아이 둘이 담배를 나눠 피우더니

주차장 담벼락에 붙어 입을 맞추고 있네요

 

사랑, 그건 아무에게도 손해나게 하는 일은 아니죠, 그런 빚이라면

살면서 누구라도 한 번쯤은 통 크게 내야지요

 

 

 

 

# 박판식 시인은 1973년 경남 함양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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