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감정은 재현되지 않는다 - 이명선
견디고 싶어서 한 사람의 고백을 듣기 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비를 기다리며 둥글어지는 땅의 체취처럼 장미가 붉어질수록 우리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처럼
어떤 고백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바라볼수록 침묵이 되어 돌아왔다
신열에 시달리는 당신의 독백을 짚어 보다가 우리는 뒤돌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헤어지는 날이 많았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당신의 영혼에 비가 비친다
알약을 녹이는 입 안에서 기도 소리를 들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을 한 옥타브씩 오르다 흙의 감정을 밟고 오른다는 미안함에 나는 흩어지고
하루가 하루를 다독이고 있는 건 부서지는 흙의 감정을 그러모으는 일
잘 배운 이별이 시야를 흐릴수록 꽃을 편애했던 당신의 미간이 흔들려 나는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였다 당신의 계절 속에 피어 있는 꽃의 감정은 미완의 환절기 속에서도 살아갈 것이다
어떤 마음을 빌려서라도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걷는사람
알 만한 사람이 - 이명선
그러지 마라
알 만한 사람이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그런 말 한마디 못 하고
불 꺼진 요가학원 옆에서 실랑이하는 연인을 보며 지나쳤다
사람의 어둠 속으로 내몰렸을 여자의 목소리가 은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두 사람의 비뚜로 나간 사랑보다 더 비뚜로 걷고 있는 나는 종이 인형을 접다 말고 나와 돌아오지 않는 가족의 귀갓길을 걱정했다
배운 대로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쉬고
다시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고
두 눈이 박힌 종이 인형에 숨을 불어넣듯 숨을 고르고 돌아서서 어둠 저편에 있는 남자에게 짱돌 같은 말을 날린다
학습된 폭력은 습득이 빨라서
# 이명선 시인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2017년 <시현실>, 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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