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전쟁들, 하찮음을 깨닫는 순간 - 신동호

마루안 2022. 8. 18. 21:27

 

 

전쟁들, 하찮음을 깨닫는 순간 - 신동호

 

 

두번의 가을

이토록 많은 후손을 남겼는데, 가을까지 저지를 악행들을 생각하면 전쟁만큼 유용한 것은 없을 듯하다.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다다를 방법은 환상이다. 있다고 믿는 것, 자신이 만든 세계에 대한 돌연변이적 망각뿐이다.

 

아들의 정의

폭염에 가로막혀 가을까지 오고 말았다. 고통은 강제로 삭제되었다. 전쟁은 아들의 것, 전쟁은 미래의 것. 반항은 분명 잠이 덜 깼거나 배가 고픈 상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 패전은 오직 생존이다.

 

노인들의 기억

수많은 모욕과 패배 속에서 건진 단 하나 승리의 기억. 기억의 증폭과 확신. 존재란 그 하찮은 기억의 결과물이다. 노인은 정의의 기회를 포착하고 자기 시대의 정의를 구현하게 되었다. 승리하였다.

 

 

*시집/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창비

 

 

 

 

 

 

하지(夏至) 무렵 - 신동호


생선구이의 뼈를 모조리 발라낸 공주는
타박이 있어도 쓴맛을 봐버린 탓에 울지 않았다
끊임없이 친절을 베풀기 위해 애쓰는 동안
국운은 기울어 골목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장수를 키워내지 못한 설움은 아직 이르다
사랑, 꿈, 의지는 종종 결핍으로 인해 체외수정했다
술잔에 몰래 눈물 한방울 보태주자
공주는 그만 자신이 평강이라고 고백했다

당신 안의 뜨거움은 기다림과 섞여 희석되었죠
불과 물이 만나도 사랑에 빠진다고 말했던가요
온달처럼 길을 잃었으나 이미 갈망을 마셔버린 뒤
그저 더위에게 모든 걸 돌리고 헤어져야 했다

지도에 그려진 곳인지 이젠 알 수 없다
여름을 밀어낼 듯 체념한 눈총이 폭우처럼 내렸지만
궁궐을 나온 공주는 아직 독주를 내리고 있을 터였다
목소리만 둥둥 남겨지고 그날, 고구려는 저물고

 

 

 

 

*시인의 말

 

열일곱살  골목에 머물러 있다. 그늘과 햇빛의 조각들, 식구 수만큼 낡아진 대문과 제각각인 살림들, 골목 끝과 모든 시작이 궁금하다. 군중 속 외로움과 남산 수사실에서의 외로움이 썩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보통강 버들과 삼지연 개박달나무, 그 색다름이 우리 집 뒷산 봄날 진달래로 반복되어 핀다는 것도 안다. 권력의 바깥과 안 역시 미완성인 목소리들의 높낮이 향연일 뿐이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모두 무덤덤하게 평범해진다. 무척 아련하다. 여전히 골목을 서성일 수 밖에 없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가보지 못한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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