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유서 - 배정원 초라한 유서 - 배정원 늙은 먼지들이 가장 먼저 그의 죽음을 알아챘다. 병실 밖 오월 햇살을 바라보며 이제 그의 콧털 속 먼지들은 낮잠이라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식은 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네 명의 남자들과 네 명의 여자들과 단 한 명의 친구와 그리고 초행길의 가이드.. 한줄 詩 2016.04.10
환멸을 찾아서 5 - 유하 환멸을 찾아서 5 - 유하 -감각의 제국 오늘도 삶은 자꾸 막다른 곳으로 나를 이끈다 환멸이여, 그러나 막다르지 않는 내일이 어디 있을까 걸어온 길들은 돌아갈 틈도 주지 않은 채 모래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사라지는 것들의 배반 같은 눈물겨움, 그 눈물겨움 너머로 난 꿈의 앙상한 해.. 한줄 詩 2016.04.10
사당역 레일아트 - 강인한 사당역 레일아트 - 강인한 지하철역 화장실 입구 무인판매대가 고개 기울여 세면대에서 검정가방 여는 사내를 내려다본다 저 무인판매대 콘돔은 누가 사 갈까 사내가 국가경제의 일부분을 관찰하며 걱정하며 가방에서 칫솔과 치약을 꺼낼 때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애절한 선.. 한줄 詩 2016.04.01
그곳에 누군가 살았다 - 박미란 그곳에 누군가 살았다 - 박미란 한참 살다 가는 인연도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놓아버렸지만 그곳에 누군가 살았다는 흔적은 붉은 벽돌집 담벼락에 내걸린 빨래 몇 벌이다 나뭇잎이 구름을 스치고 물방울이 태양을 끌어안는 동안 바람은 또 어디로 갔느냐 한숨이 오고 한숨이 질 때까지 .. 한줄 詩 2016.03.31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 유용선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 유용선 내 나이 여섯 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간 그 냄새나는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 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 한줄 詩 2016.03.30
주검옷과 땔감 - 김점용 주검옷과 땔감 - 김점용 -꿈 68 저승사자가 셋 왔다 가슴이 뜨끔하다 검은 망사 두건을 쓰고 곱게 화장을 했다 두루마기는 희고 검은 스트라이프 무늬를 넣었는데 어머니의 소복을 짜 넣은 것이다 내가 태연한 척 우리는 해당 사항 없으니 저 아래 마을로 가라고 하자 그들이 사라진다 난 산 중턱에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마련한다 나뭇가지에 옷이 주렁주렁 걸려서 무척 무겁다 동네 어른 한 분이 수의를 맞추었다며 어머니는 부러워하셨다 살아서 스스로 수검옷을 짓다니, 장롱 속에 수의를 넣어두고 홀로 지낼 어머니를 생각하니 살아 있는 무덤이 따로 없다 사람 하나 보내는 데 너무 많은 것을 준비한다 수의에 상여에 무덤에 잔치에 제사까지, 난 마침표 하나라도 남기기 싫다 땔감이나 충분히 마련해서 조상부터 내 뼛가루까지 다.. 한줄 詩 2016.03.20
참, 좆같은 풍경 - 송경동 참, 좆같은 풍경 - 송경동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 한줄 詩 2016.03.20
어느 여름날 - 이승희 어느 여름날 - 이승희 구름이 연신내역을 지나가다 말고 가만히 내 방을 들여다본다 고요한 물처럼 막막한 마음을 오래도록 밀어온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 멀리 왔다는 말 쓰러질 곳을 찾지 못해 비가 되지 못한 바람 같은 거라고 우체국 소인처럼 찍힌다 오래도록 서 있는 구름.. 한줄 詩 2016.03.20
떠나 가는 배 - 정태춘 정태춘 - 떠나 가는 배 저기 떠나 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 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 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 가는 배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두줄 音 2016.03.18
법정 스님의 의자 - 임성구 법정 스님의 책을 즐겨 읽던 시절이 있었다. 정갈하고 담백한 글에서 당신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스님이 떠난 지도 다섯 해가 흘렀다. 기억하는 것에는 동기가 필요한데 이 영화를 보며 스님을 생각했다. 입적하시기 전 세상에 내놓은 말빚을 거둬들이길 원해 당신이 쓴 모든 책을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이 머물던 불일암에 갔을 때 봤던 의자가 생각난다. 스님은 모든 것을 털고 가니 자신을 잊으라 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기억을 한다. 절판된 책의 향기는 물론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에서 각자의 추억을 되새김 한다. 때론 영화가 이렇게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는가 보다. 은은히 우러나는 녹차향 같은 영화다. 세줄 映 2016.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