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여름날 - 이승희

마루안 2016. 3. 20. 20:05



어느 여름날 - 이승희



구름이 연신내역을 지나가다 말고 가만히 내 방을 들여다본다


고요한 물처럼
막막한 마음을 오래도록 밀어온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 멀리 왔다는 말
쓰러질 곳을 찾지 못해
비가 되지 못한 바람 같은 거라고
우체국 소인처럼 찍힌다


오래도록 서 있는 구름의 끝으로 내 마음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넌 왜 버려진 거니


내가 이마를 짚어주던 그리운 것들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푸르른 것은 그것뿐이었던 어느 여름날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빗방울에 대고 할 말이 없습니다 - 이승희



상처 많은 사람처럼 자꾸만 부딪혀 온다. 아무 것도 담지 못한 생처럼 자꾸만 그렇게 부딪혀 온다. 세상은 그렇게 완강했다고 한없이 밀리는 나를 또 밀어댄다. 연두의 기억도 새들의 눈웃음도 맨드라미의 옆얼굴도 무엇 하나 적시지 못했는데 빈방들이 자꾸만 비명처럼 머리를 부딪혀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지상에 닿는 무게가 되기까지 살아냈어야 할 생이 있는 것이고, 당신의 얼굴에 내리는 빗방울은 모두 당신의 이야기, 당신이 처형한 사람들의 이야기, 더 할말도 없으면서 자꾸만 나를 붙드는 마음 같아서 유리창에 대고 마구마구 편지를 쓰네. 불빛 두어 개 붙이면 누군가의 안부처럼 쓸쓸해질 테지. 나는 자꾸만 내 얼굴을 내어준다. 그것은 허공에 대한 이야기, 이젠 허공이 된 이야기, 앞으로 허공이 될 이야기. 그러므로 저 빗방울 속에 불을 켜두고 싶은 마음. 그 사이를 비틀만한 것도 화해랄 것도 없었다. 낯섦만 깊어져 사이로 사이만 자란다고 어떤 힘만이 사이에서 갇혀 울기도 하였는데, 아주 먼 별의 뒷덜미를 볼 수 있다면 이 진부함이 좀 용서될까. 눈코입도 없는 얼굴을 씻다가 나는 무엇으로 울어야 하나.





# 참 쓸쓸한 시다.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이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쓸쓸함을 달래기 위함이 대부분이다. 시 읽기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울하고 쓸쓸한 시가 마음에 더 들어온다. 이런 시라면 몇 편을 반복해서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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