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참, 좆같은 풍경 - 송경동

마루안 2016. 3. 20. 20:22



참, 좆같은 풍경 - 송경동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처럼 센 노인네들뿐


그 짭짤한 풍경에 어디 사진기자들인지
부지런히 찰칵거리는 소리들
그런데 말이에요
이거 참, 좆같은 풍경 아닙니까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오래된 여인숙에서 - 송경동

 


사랑을 잃고
가을바람에 날리는 거리의 검정 비닐처럼
길을 헤매다
하루 저녁
어느 낯선, 외등 하얀, 오래된 여인숙 명부에
가늘어진 이름 석 자
다소곳이 적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생수 한 병 요구르트 하나 수건 한 장 받아들고 들어가
깨진 벽 유리처럼 구겨진 커튼처럼
녹슨 창살처럼 벽지 무늬가 다른 네 벽처럼
우두커니 섰다가, 한순간 무너져
때 탄 이불보로 입막고
흐느껴 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씨팔년 더러운 년 나쁜 년 치사한 년 퉤퉤 하며
마지막 자위를 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삶이 왜 잠깐
들렸다 가는 여인숙처럼 미련없는 것이어야 하는지를
세상이 왜 무엇도 가져갈 것 없이 다만
잠시 쉬었다 가는 여인숙 같은 것이어야 하는지를
왜 또 저 하늘에는 저렇듯 많은 정거장들이 빛나고 있는지를
비루한 여인숙
가끔은 어느 절간이나 성당보다
더 갸륵하고 평온한
내 영혼의 안식처



*월간 <현대시>, 2009년 7월호





# 달착지근한 카스테라 빵인 줄 알고 한 입 덜컥 깨물었더니 이빨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빵을 씹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입으로 가기 전에 손에서 먼저 딱딱한 빵인 줄 알아채고 아예 집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맛을 모를 것이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나오는 맛있는 시, 확 깨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양가 있는 시, 꼭 시가 고상한 은유를 품고 매끄러운 미사여구로 인생의 허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정한 시는 이렇게 허벅지를 바늘로 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배워서 나온 시가 아닌 겪어서 나온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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