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라한 유서 - 배정원

마루안 2016. 4. 10. 23:26



초라한 유서 - 배정원



늙은 먼지들이 가장 먼저
그의 죽음을 알아챘다.
병실 밖 오월 햇살을 바라보며
이제 그의 콧털 속 먼지들은
낮잠이라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식은 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네 명의 남자들과
네 명의 여자들과
단 한 명의 친구와
그리고 초행길의 가이드가 일으키는


정해진 소동이 일자
늙은 먼지들 더 이상 잠들 수 없어
다시 허공 속으로 떠올랐다
그의 영혼처럼
그 비상은 너무 가벼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
유서도 없이, 혹은 유서에 쓸 말을 생각하다가
또는, 아무도 읽지 않을 유서를 남기고서....


어느새 늙은 먼지가 된
그의 몸은 푸른 강물 위에 뿌려진다
한 줌 한 줌 던져지는
뼛가루들은 한 자 한 자의 문자가 되고
마침내 흐린 문장이 되어 흘러간다
피로한 낮달이 반쯤 감은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초라한 유서,
물고기들만 힐끗 올려다보고 지나가는



*배정원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벚꽃 핀 가을 - 배정원



봄 먼지 입에 물고 길을 떠났지
마음이 가을이면
만발한 저 벚꽃도 여든 노파의
머리카락으로 보이지
축축 늘어져 입 안이 텁텁하지
마른 입술 혀로 훑으며
길을 떠났지, 봄 햇살 눈부신가
눈 감고 멈춰서면
이 길의 끝을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이 가을이면
찬란한 벚꽃내음도 그대 빈소의
향냄새로 피어오르지
흰 뼛가루 흩날리는
황사바람 내 등을 자꾸 떠밀어
봄 먼지 입에 물고 길을 떠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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