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당역 레일아트 - 강인한

마루안 2016. 4. 1. 22:51



사당역 레일아트 - 강인한



지하철역 화장실 입구
무인판매대가 고개 기울여
세면대에서 검정가방 여는 사내를 내려다본다
저 무인판매대 콘돔은 누가 사 갈까
사내가 국가경제의 일부분을 관찰하며 걱정하며
가방에서 칫솔과 치약을 꺼낼 때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애절한 선율이 지금 역 구내를 샅샅이 탐색한다
창밖의 여자는 어디 있는가
무명가수 조용필은 둥둥 떠올라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가 미세 먼지가 되고
이 여름날 구경꾼들 허파 속을 들락날락한다
층계 위아래로 빗금 긋는 발길들
열차 안에서 휴대폰 메시지를 작성하는
미성년의 손가락처럼 분주하고
목에 스카프 두르고 짙게 화장한 게이를
차창 옆에 세운 채 순환열차가
이제 막 출발한다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이
지하 계단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갈 때
오줌 누는 사람들 등지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양치질한 사내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저 무인판매대 콘돔은 누가 사갈까.



*강인한 시집, 입술, 시학사


 





타이드크랙 - 강인한



물고기가 낚시에 걸렸다 풀려난 뒤
다시 낚시에 걸릴 수 있는 건 3초
기억의 한계가 불과 3초라고 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반칙에 대하여
성낼 줄 알지만, 또 너그럽게 눈감아주기까지
짧으면 몇 달 길어야 1년
그게 우리가 뛰는 그라운드의 슬픈 규칙이다


헐렁한 옷과
어쩐지 몸에 조이는 옷
그 틈에서 비정규적인 꽃샘바람이 불었던가
진눈깨비라도 살짝 뿌렸던가


잊지 않기 위해서
팔에 문신을 하고, 멋 부리기 위해서
배꼽에 피어싱을 한다
문신을 한 내가 피어싱을 한 당신과
한 몸이 되어 서로의 누드에 탐닉하는 건
만지는 살과 만져지는 살의
틈새를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윽한 사과 향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부적절한 네거리에서
추상의 사과 냄새를 미늘에 매단 속임수
그 우아한 눈물과 재채기로
캑캑, 크랙, 숨통을 조르며 피어오르는 악몽을.





# 서정시를 많이 쓰는 강인한 시인에게 이런 시는 다소 낯설다.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파고드는 싯구에 가슴이 시리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들을 시인은 따뜻한 가슴으로 걸러낸다. 그 그물망에 오롯이 걸린 시에 오래도록 눈길이 간다.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시인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어졌다. 어쩌다 시인이 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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