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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흐린 가을비 - 류근

어떤 흐린 가을비 - 류근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 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 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한줄 詩 2017.11.03

초개일기 - 김영태

지난 여름 전시회 갔을 때 알게 된 책을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었다. 아니 다 읽은 것은 지난 달이지만 지금에야 흔적을 남긴다는 게 맞겠다. 그만큼 단숨에 읽지를 않고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지난 7월 류가헌에서 김영태 시인의 10주기 전시가 열릴 수 있게 한 이재준 선생에 의하면 시인의 책을 읽을 때면 침향을 사르고 마음을 정화한 뒤 읽었다고 한다. 이재준 선생은 음악인이자 미술품 수집가로 60여 권에 이르는 초개 선생의 모든 책을 수집했다고 한다. 김영태 시인의 마지막 5년을 동행한 사이에다 초개 선생에 대한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그저 잊혀진 시인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인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글은 남아 이렇게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

네줄 冊 2017.11.03

유병용 사진전 - 사진, 말 없는 시

집에서 가까운 곳에 마포아트센터가 있다. 아무리 가까워도 내가 가지 않으면 먼 곳이다. 경의선 숲길을 산책하다 잠시 들리는 편이다. 공연이 열리기도 하지만 딱히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 없어 본 적은 없다. 대신 그곳에 있는 갤러리는 자주 간다. 이 전시는 우연히 발걸음을 했다가 보게 되었다. 라는 제목이 인상적이다. 이 작가는 아주 오래 전에 인사동 어딘가에서 열린 전시회에 두 번쯤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비교적 사진전 소식을 챙기는 편이라 그랬을 것이다. 반가웠다. 이래서 사람이든 전시회든 인연이 있어야 만나게 된다. 사진도 좋다. 말 그대로 시적인 사진이 오래 눈길을 잡는다. 실제 몇 작품 앞에서는 오래 서 있었다. 이 사람 시를 썼다면 사진 만큼 서정성이 물씬 풍길 것이다. 사진가 유병용은 잘 알려지..

여덟 通 2017.10.16

가을비 - 이은심

가을비 - 이은심 하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만 중얼거린다 오후 세시에 불려나온 그대는 젖은 꽃잎 위에 아슬히 서 있다 이름 모를 마을에서 점심을 먹는다. 처음 들른 식당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끓여주는 국밥 한 그릇. 들여다볼수록 낯선 그 처음을 수저질하며 버즘나무 이파리가 큰 새처럼 떨어지던 가을을 생각한다. 한 번의 환희와 수십 개의 절망이 소리 높여 휘몰아치던 격정의 순간들을. 편두통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휘파람 같은 가을, 그 깊은 곳에 서서 이제 그대가 나의 그리움이 되면 안 되나. 실성한 사람 하나쯤 키우고 있을 법한 마을에서 그대가 나의 처음과 나중이 되면 안 되나. 오후 세시에 상벌(賞罰)처럼 가슴을 때리고 가는 입술 새파란 비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가을 - 이은..

한줄 詩 2017.10.03

죽음 놀이 - 홍신선

죽음 놀이 - 홍신선 밤새워 낚은 잡고기들 다시 놓아준다 중환자실인 양 밑바닥에 죽은 듯 엎드렸던 참붕어나 배때기 뒤집고 혼절해 뜬 몇몇 누치들 비실비실 빠져나간다 올 밴 어망이 목숨 가지고 놀던 그 손아귀를 힘껏 열어주었다. 놀이판에서는 부가가치 큰 목숨 놀이가 제일이라고 했나 대안 병원에 일단 입감하면 결국 죽어서야 풀려난다는데 다섯 칸짜리 낚싯대 접으며 나는 수금했던 잡어들 공으로 쉽게 풀어준다 드넓은 수면에는 새벽이 희부연 등짝을 엎어놓고 떠올라 있다 막 풀려난 저 씨알 굵은 한밤 동안의 노역 몇 수, 갓 봉사 나온 호스피스같이 헐뜯긴 상처 침칠로 쓰윽 쓰윽 햝아주는 물결들에게서 통증 식히고 있거나 결리고 쓰린 몸 안에서 시간의 장독 뽑아내는 일 잠깐이리라 놀이 가운데 가장 판 큰 놀이는 죽음 안..

한줄 詩 2017.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