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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를 마치고

얼마전에 비가 엄청 내린 날 저녁에 돌아오니 빗물이 방으로 들이닥쳐 창문 아래 벽지가 흠뻑 젖었다. 늘 외출 전에 창문을 단속한다는 게 깜박했다. 두 개의 창문을 3 센티 정도만 열어 놓고 나가는데 활짝 열린 창문에 장대비가 들이친 것이다. 요즘 비가 이렇게 요란하다. 물폭탄을 퍼붓듯이 내린다. 도배를 했다. 가능한 있는 대로 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했다. 도배를 하고 나니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신문으로 도배를 하기도 했다. 한문이 많아서 다 읽지는 못해도 활자와의 친분은 그때 쌓았다. 심심할 때 벽지에 실린 기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파리똥이 까맣게 내려 앉은 천장 벽지에 매주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초겨울쯤으로 기억한다. 가난은 곳곳에 스며있다.

열줄 哀 2018.09.20

그 말 다 못 한다 - 이자규

그 말 다 못 한다 - 이자규 가까이 가서 보면 알아 슬프고도 아름다움을 잘 아는 가을은 어느 노인의 이면이기도 했을 터 한 수종으로만 일제히 S자로 굽어진 나무들, 도토리들만의 숲, 슬그머니 황금의 몸을 더듬어보다 자식 집 복잡해 노령연금 넘기고 나와 한밤중 리어카 끌고 폐지를 줍는, 주렁주렁 낳은 자식 미안하기만 해서 다 모인 노인들 파동처럼 똑같은 나무들 해마다 큰 돌에 맞고 발로 차이며 흔들려서 척추 바로 서 있는 몸 하나 없어도 오, 모르는 사람들은 황홀한 굴곡이라며 찰카닥 바라보다 간다 하나같이 휘어진 허리며 군데군데 움푹 들어간 몸 안에는 깊은 한숨 백 년도 더 열릴 자식들을 어쩌나, 잔가지들만 가벼이 팔랑거린다 도토리묵, 나무의 멍한 접시로 하루의 멍을 푸는 사람들 신발 끈을 고쳐 맨 계절..

한줄 詩 2018.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