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으로 오는 가을 - 고재종
가을은 알알이 벼 영그는 소리로 오다가
바람에 샛노랗게 벼때깔 나는 빛으로 오다가
어느덧 논두렁 이곳 저곳에 들국 향기 퍼지면
가을은 누리누리 싱싱한 황금 물결로 일렁이다가
사람과 사람의 구리빛 얼구르 하얀 이빨로 빛나다가
이윽고 천지사방에 서럽도록 맑은 햇살 쏟아지면
가을은 싹둑싹둑, 벼 베는 소리로 서늘하다가
묵직한 벼깍지 무게로 한아름 오지다가
마침내 쭉정이 알곡 가려지는 타작마당에 서면
논 안에서 풍년인 가을은 논 밖에서 흉년으로 오네
천 근 빚더미보다 더 무거운 골병과 고독으로 오네
이 땅에 그래도 여전히 가을이 온다는 것은
우리의 성성한 노동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그 빛나는 노동이 억새꽃도 눈부신 진짜 가을을
나락빛 그리움으로 노엽게 노엽게 꿈꾼다는 것
*시집, 사람의 등불, 실천문학사
개망초꽃 - 고재종
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늦은 유월의 이곳 저곳 논두렁에
우리의 한숨과 탄식과 땀방울을 쓸어 모아
해마다 해맑은 눈물방울을 뿌려대는 꽃
낫으로 그렇게 잘라내어도 새 순을 내고
제초제를 뿌려대도
끝내 의연히 살아
우리의 가난과 외로움의 자리를 항상 적시며
세상보다 더더욱 우리의 아픔을 울어주는 꽃
사람 없어 유월 늦도록 기계모내기를 하다
기사와 단둘이 맥주 몇 잔에 닭다리를 뜯는
이 새참은 더이상 들밥이 아니라고
서리서리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소리치며
하늘가에 뭉게구름 노엽게 피워올리는
꽃이 조국보다 더 은혜로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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