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날은 가고 - 이수익

마루안 2018. 9. 19. 19:58



그 날은 가고 - 이수익



웅덩이를 보면
물속으로 던지는 나의 배고팠던
우울한 저녁, 그리고 그 이틑날 새벽이
음험하게도
시퍼렇게도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


울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던
숨 가쁜 날, 겪었던
참혹한
그 기억 때문에


차라리 이빨이 사나운 개가 되고 싶었던
어쩌면 웅덩이 속에 빠져서 죽고 싶었던
끔찍한 보복을 꿈꾸던
나의 과거여


그러나
지금은 정말
살아 있는 세상이 매 순간 아름다워
숨 쉬는 자리마다 불꽃처럼 피어나는 노년기의
황홀한 고독과
기쁨이여



*시집, 침묵의 여울, 황금알








살아 있다 - 이수익



검붉은 흙은 살아 있다
강물은 살아 있다
길도 살아 있다
금 간 벽돌 자국도 살아 있다
무덤도 살아 있다
풀잎도 살아 있다
눈보라도 살아 있다
덜커덩 창문도 살아 있다
구두도 살아 있다
오, 바다도 살아 있다
번개도 살아 있다
에스컬레이터도 살아 있다
아가미처럼 크게 입을 벌린 산도 살아 있다
책은 살아 있다
먼지도 살아 있다
사막도 살아 있다
모두가 살아 있다
시퍼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
나만 이렇게 죽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