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연과 안락 그리고 동의에 관한 시퀀스 - 김연종

마루안 2018. 9. 19. 19:47



자연과 안락 그리고 동의에 관한 시퀀스 - 김연종



#3

그들은 쉽게 동의했다
부계불확실성을 믿고 있는 남자가
잠깐 망설였지만
그 믿음 때문에 또 쉽게 승낙했다
막힌 하수구를 뚫듯 틔우지 못한 生을 긁어냈다
착상하지 못한 붉은 씨앗들은 어디로 쓸려갔는지
수선비용을 지불하자마자
수돗물처럼 생리가 되돌아왔다


#2 

그들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의뢰인과 킬러사이 폭력적인 결합엔
팽팽한 밧줄 대신
느슨한 링거 줄이 놓여 있을 뿐이다
포기각서처럼 봉인된 봉투를 교환하고
영혼을 위한 안락을 정맥주사하자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결연한 표정의 의뢰인은
악착같이 산소를 흡입하고 있다


#1 

그들은 잠시 숙연했다
호상이라는 그 한마디에
아무도 망자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잠깐 묵념하듯 영정사진과 눈을 맞추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상주와 눈을 맞추지 못한 조문객들만
밤새도록 화투패를 뒤집었다
굳은 표정의 화투패처럼 그들은
서로 닮았거나 또 확연히 달랐다



*시집,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지혜출판사








닥터 피쉬 - 김연종



깨진 유리컵으로 비늘을 벗겨 내자
솟구치는 피가 지느러미처럼 팔딱거렸다
면도날 같은 욕망을 절단하여
유리 테이프로 둘둘 말았다
흐트러진 유리 조각을 수거하여 조각난 몸통을 비추다
투명한 유리어항 속에 통째로 담궜다
피 묻은 붕대를 벗겨 내자
기형의 붉은 금붕어들이 탄생했다
여인의 손
독수리의 눈
사자의 심장을 가지,
갓 태어난 금붕어가
선명한 칼자국을 숨기고 죽음 속으로 질주하자
통유리 너머 물고기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깨진 生을 유리 테이프로 봉합하고
유리컵에 난자한 피를 받아 마셨다
상처 입은 물고기들은 모두가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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