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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 이 별에 와서 - 김주대

아버지로 이 별에 와서 - 김주대 우주의 허공에 매장된 사건들은 빛의 속도로 발굴된다 수억년을 건너 과거가 불현듯 망막에 맺힐 때 초신성은 온다 모빌을 보고 눈 뜨는 아기처럼 눈 큰 짐승이 고개를 든다 지평선은 머리 위로 태양을 띄우는데 어둠을 밟고 별들이 와서 벌레처럼 많은 목숨으로 내 안에 꼼지락거린다 가장 간지러운 신경은 동공이 되어 우주의 먼 과거를 흡착한다 그러니까 나는 수억년 묵은 우주 가벼운 현재가 아니다 몸의 길목에 우두커니 서서 길을 잃고 빙하기처럼 경화되는 피가 내일을 미처 다 살지 못해도 구석구석 신성의 잔해를 움튼다 몸에서 빠져나가 버짐처럼 피어난 자식들과 눈물 한 방울이 수억년과 맞먹는 영광으로 살아야 하는 나는 태양의 위성에 아버지로 왔다 목숨 깊이 매장된 사건들이 살을 뚫고 한..

한줄 詩 2019.03.01

이름들 - 정영효

이름들 - 정영효 내가 받은 첫번째 친절은 열두 마리 짐승 중 한 놈과 생일을 엮어 만든 계획 작명은 태내의 이후를 찾아 출생에 보태는 것이지만 간혹 내 이름을 불러보면 먼 소식이 풀리지 않는 사주를 차려놓는다 그렇게 하고, 해야 한다는 식의 믿음 또는 다짐이 나와 다르게 흐르고 문틈에 낀 밤의 외막 같은 몰래 다가오던 적요가 출입을 들킨다 이름이 가진 줄거리는 계속되는 이설 그걸 채우고 죽은 사람은 자신의 명(命)을 탐독했을까 남의 이름을 외울 때 뇌압에 귀가 멍하곤 하다 글자에 묻은 음색의 취향과 얼굴을 함께 떠올리면 인연을 데려온 이력이 궁금하고 낯선 공명이 관계를 꺼낸 채 탁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알아야 해서 곧 숨겨버리는 망각 이름이 처음 만나 베푸는 예의라면 기억하기 힘든 이들은 전래가 어긋난 ..

한줄 詩 2019.03.01

달빛 노동 찾기 - 신정임, 정윤영, 최규화 외

이 책은 야간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세 명의 저자가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야간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 기록을 책으로 묶었다. 세상엔 참 많은 직종이 있지만 밤에 일하는 사람들처럼 알려지지 않는 직종이 있을까. 나부터 자정 이후에 집밖에 있어 본 적이 한참 되었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다는 다짐으로 많은 곳에서 만남을 줄였다. 회식도 무조건 1차에서 끝낸다. 원하는 사람은 2차든 3차든 상관하지 않으나 나는 과감하게 빠져나온다. 옛날 같으면 내가 나서서 2차를 가자고 선동했을 것이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자정 넘어 귀가했을 것이다. 동호회 모임도 술로 지새우는 모임은 아예 발길을 끊었다. 전화번호 정리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끝마무리가 미지근한 사람을 지우는 일이었다. 휴일 전날은 언제나 새..

네줄 冊 2019.02.26

실업자의 아침 - 이명우

실업자의 아침 - 이명우 사내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겨울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둥근 시간처럼 햇살에 구멍이 쑥쑥 뚫린다 이파리도 몸속에 있던 수분을 뿌리에게 돌려준 지 오래, 마른 바람의 멱살에 붙잡힌 나무도 모은 입을 다물었다 나무는 속이 꽉 차 있어서 가지 철조망에 걸린 사내는 앞으로나 뒤로나 옆으로나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햇빛에 나무가 더 가늘게 깎이고 있다 햇빛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갈수록 사내의 갈비뼈는 보도블록에 앙상하게 박힌다 한여름에 매달린 이파리를 나뭇가지가 다 놓아버렸다 눈보라가 사내의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내도 나무도 그림자를 지운다 나뭇잎들은 땅속에서 사각거리고 사내는 빠지지 않는 갈비뼈를 가까스로 빼내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나무들의 발소리를 뚫고 개울물..

한줄 詩 2019.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