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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우주 - 박정원

사라진 우주 - 박정원 막 깨어난 애기나비가 뭉클, 나무만 보고 걷던 나를 꼼짝 못하게 묶는다 어쩜 저리 여린 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소란스런 쪽으로 흰뺨박새가 유유히 사라진다 한세상이 오다가 빤히 내 보는 앞에서 쓰러진다 먼저 살아 본 이파리들이 애기나비와 박새를 번갈아 내려다보는 층층나무아래 박새일까 쇠박새일까 진박새일까 되뇌어보는 그 짧고 짧은 사이 *시집, 꽃불, 도서출판지혜 사막 한 쌍 - 박정원 분리된 볼트와 너트를 주우면서 동고비 사막의 당신을 생각한다 한 쌍으로 있어야 할 한 쌍이 서로가 사막이..

한줄 詩 2019.02.25

눈물 이후 - 권상진 시집

요 며칠 동안 이 시집과 함께 했다. 일 나가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 달래듯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전철에서 한두 편씩 읽는 맛이 쏠쏠했다. 흔히들 요즘 유행하는 달착지근한 시는 아니다. SNS에 들불처럼 유행하는 뽀시시한 짧은 문장은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은 있을지 몰라도 공허한 갈증은 심해진다. 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세상에 시집은 넘쳐나도 읽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일까. 시집은 시인들끼리 자체적으로 소비를 한다. 일종의 시집계 내수 경제인데 시집을 내면 서로 기증하는 관행이다. 마치 경조사 부조목록처럼 저번에 받았으니 이번엔 보내야 하는 약속 같은 것이 시인들끼리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인맥이라고 기증 시집을 많이 받는 시인이 마치 실력 있고 잘 나가는 사..

네줄 冊 2019.02.21

덫이로구나 - 장시우

덫이로구나 - 장시우 개 같은 시절이었다 나, 꽃 피었을 때 그 서럽게 춥기만 하던 봄날 서 있기도 부끄럽던 나날 어서 시들고 싶었다 시들고 시들어 마른 걸레처럼 잊혀지고 싶었다 재처럼 바람에 날리다 그래 나, 이렇게 시들어 내 지어온 시절 돌아보니 그렇구나, 사는 건 덫이로구나 東方不敗, 고장 안 나는 덫에 걸리고 말았구나 덫에 치여 나 또한 덫으로 변해 가면서 생각하네 춤이나 한 번 추었으면 춤이나 한 번 추다 갔으면 그랬으면 참 좋겠구나, 나 *시집, 중국산 우울가방, 하늘연못 우울가방 - 장시우 내 뜻과는 상관 없이 그림자, 내 몸에 붙어 다니듯 내 인생에 드리워진 저 우울의 커튼 흠 없는 살갗처럼 내 생애를 싸고 있는 우울의 저 우울한 얼굴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하다고 우울이 닳도록 말해도 여전..

한줄 詩 2019.02.21

포충망에 걸린 한 마리 나비처럼 - 황원교

포충망에 걸린 한 마리 나비처럼 - 황원교 포충망에 걸린 한 마리 나비처럼 부질없는 날갯짓과 몸부림에 살점은 해지고 부서진 날개가루가 공중에 떠올라 노을 빛에 반짝인 잠시 후, 나비는 곤총 핀에 찔려 유리 상자 속의 표본이 되고 진혼의 나팔 소리도 없이 또 날이 저문다 바람처럼 세월은 가고 푸른 망사 저고리 걸쳐 입은 생애도 저물고 아이들은 닭장 속으로 사라진다 손바닥만한 창문마다 불이 켜지고 불침번을 서려는 십자가들이 불게 발광하며 어둠 저 편에서 걸어온다 천국의 길은 어디쯤에 있을까 하느님과 천사들이 산다고 믿고 싶은 그 곳, 아, 거기에 내가 꿈꾸는 사랑과 평화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단 꿀을 품은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하고 있을 거야 나비는 애써 즐거운 생각을 하며 눈꺼풀을 조금씩 내린다 어느덧..

한줄 詩 201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