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묘비명을 쓰다 - 우대식

마루안 2019. 2. 25. 21:58



내 묘비명을 쓰다 - 우대식



시인이랍시고 묘비명을 써달라는 친구 놈의 부탁에
그 친구 삼촌의 죽음을 찬(贊)하다
죽도록 고생하다 하직하심
죽도록 자본과 투쟁하다 가심
나쁜 습관처럼 늘 삶을 꿈꾸심
싫으냐
그럼 서해 바다 노을처럼
서산 앞바다 어느메쯤 장엄하게
가라앉으심
문득,
나여
돌을 두드리고 앉은 나여
나 언제쯤 가라앉을까
가라앉을 수 있을까
내, 묘비명을 쓰다
쑥쑥 가라앉다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천년의시작








길 - 우대식



방황의 끝에서 본 것은 이별이었다
이별 뒤에는 여러 길들이
흰 갈비뼈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지리산 세석평전 뒤로 두고 떠나던 곳에도
신촌 지나 마포 가는 곳에도
나란하고 구부러진 것은 모두 길이었다


봄이 되면 길들은
깊은 수렁이 되어
돌아볼 때마다
가슴에는 돌이 쌓이고
푸르른 나무에 기대면 나무는 쓰러졌다


길들은
늘어난 무릎 인대 조이듯 긴 목을 빼 두르며
人跡을 유혹했다
人跡이 이어진 길을 걷다보면
절반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절반의 희망,
절반은 언제나 길 위에 있었다
도적질로 불면의 밤을 지샌 사내처럼
산그늘 아래 덜컹거리는 미닫이 문소리를 냈다
봄날도 몇 일 쉬지 않고 흐르는 눈발,
그런 눈발로 남고 싶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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