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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 전형철

나쁜 피 - 전형철 자주 밤을 복기한다 눈을 오래 뜨면 혀가 굳고 날숨과 들숨에 수갑이 채워진다 내가 아는 식구는 다섯인데 우리는 다섯 곳에 산다 한숨을 쉴 때마다 징검다리같이 눈이 하나씩 생긴다 빈 들이라고 생각한 거개 보이는데 만져지지 않는 뿌리가 자란다 낯선 곳이 낯설지 않고 바람의 발음과 나무의 억양을 받아 적지 않는다 딱정이가 앉고 핏자국이 말라간다 땅속 물길들이 흘러가는 그곳으로 오래전에 충이(充耳)를 막았어야 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재의 날 - 전형철 달력에 오지 않은 시간을 채비하다 동그라미, 가위, 가위, 그리고 가위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날들 다음 문장에서 머뭇거리는 커서처럼 이별을 망설이는 연인의 입술처럼 문득 신용카드 한 장 없이 살아왔는데 소수(素數)처럼 규칙 ..

한줄 詩 2019.03.06

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 전강수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푹 빠져서 읽은 책이다. 그만큼 몰입해서 읽게 만드는 주제였다. 토지공개념이 위헌 소지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거니와 오늘날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늘 뜨거운 감자다. 어쨌거나 이 문제는 꼭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전강수 선생은 예전에 몇몇 매체에 실린 칼럼을 읽고 진보적인 경제학자로 알고는 있었으나 저서를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헨리 조지의 명저인 진보와 빈곤을 필두로 평생을 토지제도를 정의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연구를 해온 학자다. 이 책은 도표와 통계 등 경제에 관심이 덜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 부동산 문제를 아주 흥미롭게 기술했다. 경제 분야가 딱딱하기 십상인데 아마도 논리적인 글솜씨 덕도 있겠다. 어쨌든 학자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

네줄 冊 2019.03.05

곱게 늙은 소년 - 정태춘

올해가 정태춘 데뷰 40주년이란다. 정확히는 41주년이나 10년 전에 아내 박은옥의 데뷰 30주년을 기리면서 그만 그렇게 굳어졌단다. 40주년이든 41주년이든 가수에게는 소중한 기념이다. 요즘 나오는 가수 중에 과연 20주년인들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80년대 중반, 뭣도 모르고 겉멋만 잔뜩 들어 싸돌아다닐 때 정태춘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풍물하는 친구였는데 늘 계랑 한복을 입고 다녔다. 일산이 신도시가 되기 전 백마역 부근은 자주 가던 곳이었다.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타고 백마역에 내리면 황량한 내 청춘에 화색이 돌았다. 그곳에서 친구와 듣던 청태춘의 노래 촛불이 생각난다. 어서 스무 살이 되고 싶었으나 막상 스무 살이 되어도 별 볼일이 없던 시절, 동동주에 발갛게 물든 얼굴로 촛불이 눈물..

여덟 通 2019.03.05

이맘때면 - 김화연

이맘때면 - 김화연 이맘때라는 말은 일 년 언제든지 있는 때 지나간 시간을 느닷없이 소환하는 때 작년과 재작년을 오늘로 불러놓고 어금니쯤에 고이는 신맛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때 이맘때라는 말은 흰 구름 의자에 앉아 파랗게 익어가는 나뭇잎에 들뜨고 이빨 사이로 굴러다니는 빈 씨앗 같은 말들이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때 우리는 이맘때를 앞에 놓고 날리는 머리카락 쪽으로 웃고 떨어지는 열매 쪽으로 시무룩해진다. 비술나무 그늘 밑에서 손뼉을 치며 술래의 속눈썹으로 떨렸던 이맘때 이맘때라는 말이 저 맘과 그 맘 사이에서 편지를 쓴다. 느린 우체통 안에 마른 겨드랑이에서 몇 글자 꺼낸 즐거운 기억을 우리 맘대로 소환하여 되씹는 이맘때라는 말이 흐르는 구름 속에 가려지고 있다 *시집, 내일도 나하고 놀래, 천년의시작 *..

한줄 詩 2019.03.03

바람의 시간 - 육근상

바람의 시간 - 육근상 느타리버섯 종균목 쓰러뜨린 바람이 있는 힘 다해 몸 흔들자 바닥에 납작 엎드린 서리태가 대궁을 둥글게 말아쥐고 이파리까지 털어낸다 썩은 모과가 해소병에 좋다며 상처 난 모과만 골라 넣던 아버지는 계단 몇 번 오르내리시더니 주저앉은 얼갈이배추를 보고 버럭 소리부터 지른다 갠 하늘이 눈부시다 먹감나무 이파리로 숨자 요란하던 풀벌레가 울음 멈추고 별동별 데려와 뒤란에 풀어놓는다 이 시간 우주는 나를 건너가는 중이다 *시집, 만개, 솔출판사 화양연화 - 육근상 오그리고 앉은 모습이 즈이 엄마 젊을 적 모습이라서 쉐타 걸치고 시장이라도 다녀올 모습이라서 꼭 시장에 갈 일 있어서도 아닌데 딸아이 손잡고 반찬가게며 과일가게 기웃거리다 살구나무집 펼쳐놓은 징거미* 한 됫박 사고 돼지국밥집 들러 ..

한줄 詩 2019.03.02

편의점에서 불편하게 살다 - 이은심

편의점에서 불편하게 살다 - 이은심 늘 폐업세일이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믿음을 카드인식기에 밀어 넣고 느리게 다가오는 죽음의 이미지에 바코드를 붙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고 몰라도 될 것들은 더 잘 외워지는데 선반 하나가 공연히 망가진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한다는 주의사항을 정독한다 추락주의와 추락 주의에 한 발씩 걸친 생필품들은 반사경 속에 살림을 차리고 오래 살 궁리 중 이 오지에서 소나기 다녀갈 때 라면을 끓이면 가슴이 먼저 졸아든다 진열장의 물건들이 곰팡이를 피우는 이유는 열 가지도 넘는다 나는 전보다 더 잘 웃지만 웃어도 우는 것처럼 보인다고 단골들이 등을 돌려 건너편 가게로 간다 일당에 울고 웃는 생의 막일꾼 젤리처럼 줄줄이 엮인 나 자신을 헐값에 처분하고 짬짬이 짜다 만 손익..

한줄 詩 2019.03.02

아버지의 술잔 - 류정환

아버지의 술잔 - 류정환 단칸방의 침묵이 부끄러워 가득 채워 놓아도 보잘것없는 소줏잔. 쓴 삶의 아버지는 군대 가는 아들을 보내는 아침 밥상 위의 무거운 미명(未冥)을 서둘러 비우고 하루분의 일을 사야 할 시장으로 간다. 낯선 도시의 금속성 시선들 사이 한 개의 토큰처럼 비좁은 안식을 물러나와 바람 찬 삶의 시장에서 물려받은 노동을 잘라 팔며 아버지는 두고 온 고향과 해묵은 빚을 청산하고 일용할 양식과 아들놈의 등록금과 날마다 덜어내는 땀에 전 목숨을 가늠한다. 견고한 뒤축에도 발자국이 남지 않은 바람처럼 초조한 도시의 퇴근 무렵 피곤한 불빛들이 모여 앉은 주점의 간결한 안주(安住). 한 짐의 죄도 못 되는 가난으로 하여 아버지의 목을 꺾던 술잔은 왜 눈물을 닮았을까. 어둠 속에 투명해진 아버지는 비어도..

한줄 詩 2019.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