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들 - 정영효
내가 받은 첫번째 친절은
열두 마리 짐승 중 한 놈과 생일을 엮어 만든 계획
작명은 태내의 이후를 찾아 출생에 보태는 것이지만
간혹 내 이름을 불러보면
먼 소식이 풀리지 않는 사주를 차려놓는다
그렇게 하고, 해야 한다는 식의 믿음
또는 다짐이 나와 다르게 흐르고
문틈에 낀 밤의 외막 같은
몰래 다가오던 적요가 출입을 들킨다
이름이 가진 줄거리는 계속되는 이설
그걸 채우고 죽은 사람은 자신의 명(命)을 탐독했을까
남의 이름을 외울 때 뇌압에 귀가 멍하곤 하다
글자에 묻은 음색의 취향과 얼굴을 함께 떠올리면
인연을 데려온 이력이 궁금하고
낯선 공명이 관계를 꺼낸 채 탁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알아야 해서 곧 숨겨버리는 망각
이름이 처음 만나 베푸는 예의라면
기억하기 힘든 이들은
전래가 어긋난 속계(俗界)를 지닌 걸까
정해진 문답으로 인사하는 순간마다
내 육성을 의구하므로
이름은 나를 훔치기 위한 혐의인지
자주, 잊힌 이름들의 주기가 돌아온다
*시집, 계속 열리는 믿음, 문학동네
회로 - 정영효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더 비슷해지기 위해 우리는 숫자를 뽑아 점괘를 맞췄고 흔한 인사법으로 상냥함을 대신했다 회색의 도시보다는 야경을, 상상보다 상상이 주는 걱정을 나눠가진 채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만 우리는 조금 더 짙어졌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어디가 끝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낮게 엎드려 지나가는 것들을 응시하는 길목으로 조용히 고백하는 것, 그게 너에 대한 내 유일한 다짐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놓치면 가로등은 왜 늘 앞에서 시작되고 있는 걸까 저곳을 돌면 어떤 얼굴로 우리는 마주할 것인가 매번 같은 길로 돌아왔지만 기대는 반복될수록 두려웠고
비로소 집으로 가기 싫다는 용기가 필요했을 때, 우리는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너의 집이 아닌 곳으로 내 집이 없는 곳으로 굳은 표정이 이어지는 도시의 끝자락에서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는 두려움과 함께
# 정영효 시인은 남해와 부산에서 자랐다.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계속 열리는 믿음>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결 - 한우진 (0) | 2019.03.01 |
---|---|
아버지로 이 별에 와서 - 김주대 (0) | 2019.03.01 |
오지 않는 저녁이 없는 것처럼 - 문동만 (0) | 2019.02.26 |
한 시절 - 신경현 (0) | 2019.02.26 |
퇴직 - 박두규 (0) | 2019.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