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낯선 뒷모습 - 김종해

마루안 2020. 3. 29. 22:16



낯선 뒷모습 - 김종해



노인은 천천히 여장(旅裝)을 꾸린다

죽기 전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저녁 무렵이나 밤이 다 되어

그가 떠나려고 하는 그곳은 어디일까

치매라는 이름의 낯선 뒷모습이 아프구나

세상을 다 놓아버린다는 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의 이름을

놓쳤다는 것이다

바람이며 꽃이며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

밤낮의 의미가 잊혀진 것처럼

삶 속의 만남과 헤어짐도

모두 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캄캄한 무위(無爲)의 사랑이여

가는 길도 잊고

오는 길마저 잊은 채

행선지마저도 묻지 마라

죽기 전에, 또 하나의 망각 속에 들기 전에

오늘 그대의 이름만은

뒷사람의 추억 언저리에 부디 남겨지고저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 문학세계사








길을 걷다 - 김종해



아침 산책길에

혼자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꼬부랑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 걸어가는 뒷모습 보는 동안

어느 새 그 사람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나에게 얼마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겐 병들지 않은 몸과

지팡이 없이 걸어갈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음을

고맙다, 고맙다고

하늘에 기도하듯 입속말하며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어제까지 세상 속의 허상(虛像)을 쫓아온

나의 보법(步法)은 너무 단순하다

걷는 길 어디에서나 허방이 따라오고

사는 곳 어느 곳에서나 참회가 필요했다

아침 산책길 위에

나하고 방위가 달라서

깜짝 놀란 새 한 마리

인왕산 쪽으로 화살을 쏘듯

잽싸게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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