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 곽효환

마루안 2020. 3. 30. 19:28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 곽효환



아직 새순 오르지 않은 나무를 보러 갔더니
잘 매만진 생태천에 봄꽃 가득하다
물길을 따라 난 꽃나무길
바람 일 때마다 꽃잎 분분하다
비스듬히 기운 봄볕
떨어지는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하나
한 세계가 설핏 열렸다 닫힌다
천변 너머 옹기종기 빈루한 작은 마을
둑길에 잠시 세워둔 손수레, 털털대며 달리는 삼륜트럭



한 계절이 차고 또 기운다
가지 많은 정자나무, 차례로 피었다 지는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나무 목련 그리고 살구꽃



한 시절이 왔다 간다
나지막한 흙담집과 시멘트 벽돌로 지은 개량 한옥 몇 채
동구 슬래브 지붕 아래 나란한 싸전과 구멍가게와 대폿집



화창했던 하루가 뉘엿뉘엿 저문다
단출한 자전거포, 조금 떨어진 오래된 예배당
아버지의 긴 그림자 어른어른 지난다


다섯
바람 분다 배꽃 내음 아슴하다
과수원집 단발머리 계집아이 숙이 그리고
적송 울창한 천변(川邊)의 아이들



*곽효환 시집, 너는, 문학과지성








소문난 추어탕집 우거지해장국 - 곽효환



종로 탑골공원 돌담길 따라 낙원상가 오른편
도심의 그늘 속 60년 전통 소문난 추어탕집
하나뿐인 메뉴는 미꾸라지 없는 우거지얼큰탕
플라스틱 뚝배기에 담긴 소뼈 우린 국물에
흐물흐물한 우거지 몇 가닥, 두부 한 토막과 파 몇 조각
그리고 희멀건 깍두기 한 종지와 소복한 밥 한 공기


커다란 국솥 뚜껑을 열면
새벽부터 밤까지 하얗게 피어오르는
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새벽을 밝히는 사람들
생의 고비를 힘겹게 넘거나 혹은
어느 언저리를 지리하게 지나는 사람들이
고된 삶과 세월의 더께가 까맣게 내려앉은
둥근 나무 탁자 낯선 틈새에 제각각 끼어 앉아
설렁설렁한 해장국에 든 밥술을 말없이 뜬다
힘에 부친 가난한 하루를 꿀꺽 삼킨다


한낮에도 빙점을 넘나드는 날씨
가설 비닐 포장 밖 플라스틱 의자에
홀로 웅크리고 앉은 초로의 사내가
메마른 목구멍으로 국밥을 넘긴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마신 그가
굽은 허리를 펴고 천천히 걸었으면 좋을
세밑 겨울 오후 시울은 볕이 느리게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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