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목련 위 흰 눈 - 김창균

마루안 2020. 3. 27. 19:16



목련 위 흰 눈 - 김창균



작심한 듯 주먹을 움켜쥔 아이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말을 건네는 설렘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시비를 거는 건달처럼

그렇게 그렇게


백내장 수술을 한 외할머니가

두툼한 안대를 하고 빼꼼이 삼월 목련을 보는데

그 애미보다 일찍 세상 같은 건 버린

내 엄마는 탱탱하게 물이 오른다


먼 데 사는 혈육이 몹쓸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

막 목련 벙그는데, 그 위에

눈이 얹힐 거라는 예보가 막막하게 들려오는

오, 낯선 저녁


또 한 시절이 탱탱하게 쥐었던 주먹을 풀며

으앙으앙 운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전지 - 김창균



둥글고 큰 잎에 세들어 사는 늙은 세입자처럼

늘 그늘 아래를 걷다 거리에 나가니

머리 자른 가로수들 줄맞춰 서 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하다 아버지에게 들켜

강제로 머리 깎인 여자 친구 생각이 나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저것들도

무슨 일 많은 것들과 대결하다 머리가 잘렸나

이런 생각에 그 잘린 머리에 빨간 머리띠를 묶어준다

머리채를 잡고 통곡할 일도 없는데

푸른 하늘에 맨살을 드러낸 너를 보니

자꾸 눈물이 나는 것은 내가 세월을

잘못 살았거나 세월이 내게 잘못 왔거나

그런 것이겠지, 그러나

서러운 것은 아니리

절 뒷마당에서 머리를 깎으며

조용히 한 생을 내려놓는 젊은 수좌와 같이

끝내 서러운 일은 아니리

그저

얼추 다 큰 새끼에게 빈 젖을 물리며

늙은 애미가 자식과 이별하듯

등을 떠미는 일과 같으리






# 김창균 시인은 1966년 강원도 평창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먼 북쪽>,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가 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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