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줄 哀

어느 시인의 시에 대한 넋두리

마루안 2020. 3. 27. 19:05

 

 

오늘날 시의 효용성과 가치를 따지는 일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을 테다. 시가 돈도 밥도 명예도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공작이 펼친 깃털이 아름답다고 굶주린 자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시는 공작 깃털과 다를 바 없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한 줌의 언어는 무력하고, 무력하고, 무력할 뿐이다. 밤과 바다, 무덤과 아침 이슬, 나뭇잎과 뿌리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누설하는 시가 식탁 위 후추통보다 더 쓸모없다는 게 중론이다.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섬기는 시가 현실의 공리적 필요에 부응하지 못함을 부정할 수 없다. 시는 굶주림, 전염병, 인종청소, 전쟁, 폭력, 이념 갈등 같은 세상의 부조리와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시는 끊임없이 씌어져서 굶주린 새떼같이 독자를 찾아 날아간다. 

 

시는 흡혈조가 되어 독자의 피를 훔치고, 저 너머 어딘가에 무지개가 있다고 노래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불행과 맞서 싸우느라 미처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다.

어떤 이는 시인이란 백해무익한 종자라고 단정을 짓는다. ‘인간을 찾는다’고 대낮에 등불을 든 채 아테네를 누비는 디오게네스의 후예라니! 시인이란 그토록 하염없는 존재들이다. 놀라워라, 우리는 한 해에 시집이 3000종 이상이 쏟아져 나오는 나라에 산다. 

 

이토록 기이한 시의 부흥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정작 그 많은 시집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시는 말들의 의식(儀式), 하나의 이야기, 기도, 초대. 아무런 현실감 없이 독자에게 흘러가서 마음을 흔드는 진짜 반응을 일으키는 말들의 흐름.”(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시는 이야기, 기도, 초대, 말들의 흐름이다.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흘러가서 파동을 일으키는 말들. 그렇지 않다면야 시집 양산은 쓸데없는 노고와 종이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시는 메아리가 없는 외침이요, 목청껏 울지도 날개 쳐서 날지도 못하는 병풍의 수탉이요,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그림자의 짝사랑에 그치고 만다.

많은 시인들이 문학잡지와 출판사에 시를 투고하나 게재나 출판을 거절하는 편지를 받는다. 시인들은 꿋꿋하게 써서 다시 잡지사에 보내고 시집을 묶어낸다.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의 양산은 오늘날 시가 처한 가난한 운명을 보여준다. 

 

램프에게 제 시를 읽어주는 시인이여! 그 램프마저 시에 귀를 닫을 때 그저 말없이 빛을 보내주는 것에 기뻐하는 시인이여! “그래서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머리맡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 준다./아마도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헤르만 헤세, ‘편집부에서 온 편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문학상을 여럿 받은 시인조차 한 세대 뒤 시는 다 잊히고, 백년 뒤엔 이름조차 망각에 묻힐 게 분명하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고 살아남는 시인은 한 세기에 몇 명뿐이다. 

 

그러니 자기 시가 불멸할 거라고 믿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치매가 아닌지를 검사해봐야 하리라. 미국 의회도서관의 계관시인으로 뽑힌 도널드 홀은 이렇게 말한다.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의 시가 영원불멸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울증에 걸렸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다.”(도널드 홀, ‘죽은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이투데이 - [장석주의 시선] 봄날 오후에 읽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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