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사이도 좋게 딱 - 황형철 시집

마루안 2020. 6. 8. 22:23

 

 

 

무작위로 꽂혀 있는 시집 코너에서 어떤 선을 긋고 나서 그 안에서 시집을 선택한다면 몇 권이나 고를 수 있을까. 나름 열심히 시를 읽으려고 하지만 열 권 중에 한 권 눈에 들어오면 대단한 행운이다. 시인의 유명세나 미디어 언급 빈도와는 별개다.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 스무 권 중에서 한 권 정도의 확률이다. 시집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내 마음에 들어오는 시로 한정한다. 가능한 이 땅의 모든 시집을 읽고 싶으나 아량을 베풀 시간이 없다.

읽을 것은 많고 시간은 없고, 활자를 받아들이는 내 눈은 점점 늙어간다. 이럴 때마다 싱싱했을 때 더 많은 책 읽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왜 그리 싸돌아 댕기면서 게으름을 피웠나 몰라. 내겐 먹는 것이 남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남는 것이다.

이 시집을 발견할 때는 이름이 생소했다. 몇 편 읽어보니 아는 시인이다. 황형철 시인은 등단한 지 20년인데 이것이 두 번째 시집이다. 다소 게으른 시인이다. 허나 데뷰만 하고 사라진 시인이 부지기수인데 이것도 어딘가.

내 기준으로 보자면 매년 시집을 내는 자판기 시집보다 차라리 이것이 낫다. 적어도 희귀성은 있으니까. 놓치지 않고 보는 신간 소식란에서 눈에 들어와 이 책 읽어야지 했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냥 통과 시킨다.

눈에 붙는 시가 있어 이 시 블로그에 올려야지 했는데 어디가도 볼 수 있는 시라면 올리는 것 또한 포기한다. 그런 시 올리기는 쉽다. 일일이 오타 교정해 가며 타이핑 할 거 없이 여기저기서 복사해 갖다 붙이면 되니까.

나는 양보다 질이다. 그 동안의 내 삶이 워낙 저렴했기에 더 그럴 것이다. 타고난 천성이 비주류에 아웃사이더여서인지 1등보다 2등에 더 눈이 간다. 어쩌다 그 2등이 분발해서 1등이 되면 바로 다른 2등에게 눈길을 돌린다.

1등이 싫거나 샘이 나서가 아니라 1등은 내가 아니어도 봐 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황형철 시인은 숨어 있는 시인이다. 당사자가 들으면 서운해 할지 모르나 내가 보기엔 숨어 있어서 더 관심이 가는 무명이다.

뒤늦게 읽은 첫 시집부터 인상 깊었던 것인데 그의 시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이 시집에도 두고두고 읽고 싶은 좋은 시가 여럿이다. 지나칠 수 없어, 행여 잊을까 봐 메모지에 적어 벽에 붙여 논 여운이 남는 구절 하나가 있다.

<착하고 순했던 평생이 밀려온다// 딴전 한번 없이/ 예까지 온 생애도 측은한데/ 당신의 꿈은/ 설움에 젖어 야위었고// 우리가 건너야 할/ 서로 다른 벼랑을 보며/ 행여 들킬까 꾹꾹 울음을 누른다> -모로 누운 당신 일부. 나는 이 시를 그의 대표작으로 결정했다.

또 시가 조금 간결해지면서 전달력이 배가 된 시도 발견한다. 기존에 발표한 시 <목격담>에서 몇 개의 助詞를 빼자 담백하고 여운이 남는 <배추밭>으로 변했다. 시인은 독자에게 조금 불친절할 필요가 있다.

4.3이나 세월호 사건 등 다소 과장될 수 있는 감정을 꾹꾹 누른 서사성에다 빼어난 서정성을 담아낸다. 시인이라고 모두 이슬처럼 맑기만 할까. 그러나 시인을 본 적은 없지만 무지 착할 것 같다는 느낌이 시에서 묻어난다. 아껴 가면서 읽고 싶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