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 조항록

마루안 2020. 6. 19. 19:17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 조항록


미끄러질까 걷다가,
한 번쯤 나를 잊었더라면

사물들이
형상의 고통을 잊고
쓰임새만 남기듯

한 시절 그윽하게
나를 불태우기만 했더라면

망설일 것이 뭐라고
서성거릴 것이, 두리번거릴 것이
허정거리는 밤거리가 뭐라고

하얀 뼛가루처럼 순결했던
나의 무지(無知)

그걸 알아, 두 눈 질끈 감았더라면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옛 노래 - 조항록 


진작 잊은 줄 알았는데 
입에서 맴도는 멜로디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열아홉 살의 지하 음악다방에서는 
바깥의 햇살을 몰랐지 
한순간 세상에 꽃들이 만발할 줄이야 
사뿐히 한참 낙엽이 쌓여 
세상의 길들을 쓸쓸히 용서할 줄이야 

네가 떠나고 벌써 
여러 번의 계절이 이승의 굳은살을 도려냈는데 
나는 그 노래를 잊지 못했던 것이네 
차마 잊지 못해서 하늘과 땅 사이 
그 노래의 악보로 밥을 먹고 꿈을 꾸었네 

냐도 모르게 우물거리는 어딘가의 악기들 
눈물의 현(絃)으로 연주하던 너의 움퍽한 이야기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그리움이 
툭하면 나의 가슴 깊숙이 머리를 처박네 
현기증이 나도록 마음을 여닫네 

은근슬쩍 맨발을 들이미는 그 노래 
나에게 네가 
누구였더라?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 <눈 한번 감았다 뜰까>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몸살 - 조성국  (0) 2020.06.21
불안한 인연 - 박미경  (0) 2020.06.21
하루의 감정 - 김정수  (0) 2020.06.18
신용불량자 - 백성민  (0) 2020.06.18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0) 2020.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