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토란꽃이 쏟아졌다 - 박미경 시집

마루안 2020. 7. 27. 21:45

 

 

 

아주 묵직한 시집을 읽었다. 우화적이면서 서사성이 강한 시들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OO했어요. OO할 거에요. 그랬습니다 등 경어체로 된 달달한 시와는 다르다. 단 것을 많이 먹으면 헛배만 부르고 목이 마르다. 시도 그렇다. 요즘 시들은 너무 달다.

꿀이라도 들었으면 다소 위안이 되련만 성분을 분석해보면 단 맛을 내는 것들이 죄다 인공감미료다. 달달한 문장, 현란한 수사(修辭), 거창한 문학이론까지 모범적으로 동원했지만 뒷맛이 공허하다. 아니면 내가 그런 시에 공감 못하는 문자부적응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류 시인보다 숨어 있는 비주류 시인에게 더 관심이 있다. 이 시집은 맺힌 것을 드러내지 않고 울음을 참으며 꾸역꾸역 쓴 시라고 할까. 그래서 매끄럽게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읽으면서 금방 맛이 느껴지기보다 오래 씹어야 맛이 우러난다. 

토란꽃이 쏟아졌다는 이색적인 제목에서 쉽게 넘어가지가 않는다. 나는 토란꽃을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 텃밭에 우산처럼 큼직한 잎을 달고 섰던 토란은 기억한다. 명절 때마다 먹어야 했던 토란국은 별로 맛이 없었다. 어머니는 떡국 자시듯 잘도 드셨다.

어릴 적 동네에는 몇 개의 기와집 빼고는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였던가. 한두 집씩 초가를 걷어내고 양철 지붕이나 슬레트 지붕으로 바꼈다. 경사진 마을 맨 꼭대기집이었던 우리집은 몇 안 남은 초가집을 당당히 유지했다.

유독 지붕이 높고 마당도 넓은 기와집이 있었다. 집안에 우물이 있어서 그집 식구들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어서 블로크 담벽 한쪽의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호기심을 풀었다. 넓은 마당 한쪽에 토란밭이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의 여자는 늘 근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싸움소리, 첩을 얻어 사는 남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소리가 잦아 들면 개구쟁이들은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집 안을 훔쳐봤다. 토란밭의 큰 잎사귀에 가려 마루가 절반만 보였다. 

모든 식물이 꽃을 피우지만 대꽃이 피는 걸 못 본 것처럼 토란꽃이 피기는 할까. 박미경 시인은 사라진 풍경이나 지우고 싶은 추억을 생채기 내듯 불러낸다. 사람의 일생은 티끌이자 우주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문두이 여사가 여든여섯 생을 마감했다.

<이제 겨우 짊어진 짐 다 내렸는데/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몸뚱이 다리 쭉 펴고 쉼을 했다/ "잘 살아라. 잘들 살아라" 달구 밟을 때, 아들들/ 지난 날 절반은 땅 아래로 묻고 반은 봉분으로 올렸다/ 그녀가 퍼주던 고봉밥보다 한참 낮았지만/ 그녀에게 드디어 봄날이 왔다> -문두이 여사의 봄날 일부

시집에는 어긋난 시절의 인연도 살아내야 하는 감내의 세월이 곳곳에 담겨 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시인의 단단한 내공 또한 긴 감내의 결과물이다. 흘러간 유행가 선율과 모시 저고리 단정히 입고 시조나 서도소리 읊는 여인의 일생을 느낀다.

미경이란 이름이 흔해선지 시인 중에 박미경이 여럿이다. 초등학교 때 교실에서는 작은 미자 큰 미자로 구분을 했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이 시인은 아주 늦은 나이인 2017년 <시에>로 등단을 해서 이번에 첫 시집이 나왔다. 오래 우러낸 진국 같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