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상의 감옥 - 여태천

마루안 2021. 3. 31. 22:29

 

 

지상의 감옥 - 여태천


공기가 달라졌다며 사람들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하얀 마스크의 사람이 뿌연 길 저편으로
부리나케 뛰어간다.

며칠 전 한 사람은 옥상으로 전광판으로 타워크레인 위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듯이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는 듯이
땅을 벗어나 하늘로 올라갔다.

아무도 안 보는 가난한 하늘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양철지붕을 식혀 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격앙하지도 울부짖지도 않는다.

부산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어색한 몸짓으로 서로를 흉내를 낸다.
때가 되면 불이 켜졌다 다시 꺼졌다 
반복되는 풍경들 속으로
똑같은 모양의 얼굴들이 보인다.

여긴 마치 감옥 같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나같이 외롭다는 표정이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햇빛 한 줌 - 여태천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구나.
멀리서 온 너의 편지에는 함께한 이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구나.
녹아내린 글자들
오랜 시간을 건너오느라 힘들었구나.
힘들게 적어 내려간 마음 하나하나를
차마 보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런데 어쩐 일일까?
편지를 읽을수록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은
헤어날 수 없는 구렁은
이렇게나 외롭구나.

유월의 햇볕은 게나예나 뜨겁다.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가지를 뻗고
나는 더는 자라고 싶지 않다.
자랄 수가 없다.
잎 사이로 흔들리는 햇빛을 보고 있자니
열일곱 내가 보이고 서른을 넘어서도 불안했던 시절이 있다.
익숙한 눈빛이 그래서 좋구나.
저녁의 감정은 이래서 기쁘기도 하구나.
그런데 깊은 밤 잿더미 속에 불씨를 감추어야 하는
나이는 부끄럽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더라.
참혹한 일을
언제나 그렇듯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알아채고
일그러진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구나.

 

 

 

 

# 여태천 시인은 1971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스윙>, <국외자들>,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등이 있다. 제2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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