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맹세 - 김옥종

마루안 2021. 3. 31. 22:22

 

 

맹세 - 김옥종


아즉 애 늙은이는
길을 따라 나서지 못해 갈매기 울음소리로
네가 등진 이승의 서쪽 하늘에 대못 박아 흘린
매화꽃 노을에, 한참을 뒹굴다가
술은 일찍 동이 나고
눈물샘은 닳아져 버렸으니
뉘 있어 너와 함께 인어바위 건너
삼학도로 돌아갈 것이냐
구 터미널 미로스낵 한 켠에 마주앉아
소주병에 맥소롱 타 마시다가
밥태기꽃 흐드러지는 사월에
덤장 들춰 잡아온 보리숭어 건정 찌고
갑오징어 데쳐서 소풍가고 싶은 날
맞닿은 살 향기로도 부족해
남의 살 한 점 물어뜯고 싶어
데쳐낸 정소와 복어 쑥국에
통음 하다가
햐얀 꽃비 내리는 비탈길에서
브레이크 없는 생 앞에 게워 내었다
다시는
왔던 길을 취기 없이 돌아가지 않으련다
다시는,
엎어졌던 꽃길 위에서 일어나지 않으련다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꽃 - 김옥종


낙루의 염분으로 자라는 꽃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

빗겨 지나 간 인연에게서 묻어오는 기억들을
비좁은 시간의 초침 사이로 훔쳐보았을 때
한줌의 흙이면 뿌리를 내리고
한 타래 찢겨진 햇살이면 목은 꺾이지 않고
한 방울의 물이면 혈관에 가득 고이는 넉넉한 삶
그렇게 되기까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꽃에게도 있었다

저무는 하루가 토해내는 부서진 노을이 있어야
지친 듯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오는 숙면의 밤이 있듯
한 풀 꺾인 바람도 절뚝거리며 갈 길을 재촉하는데
너의 절망은 왜 아무것도 잉태하지 못하는가
너의 비탄은 왜 아무것도 분만하지 못하는가

보아라!
어느 꽃이 제 몸에 생채기가 있다고
개화(開化)를 늦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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