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녀가 사는 법 - 김선향

마루안 2021. 3. 30. 22:14

 

 

그녀가 사는 법 - 김선향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아주 오래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거대한 악어 한 마리

방을 독차지한 그랜드피아노

그녀는 싱크대 앞에 요를 깔고
모로 눕는다

애인의 뺨을 어루만지듯
피아노를 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그녀가 유일하게 웃는 때

피붙이 대신 피아노
고양이 대신 피아노

피아노는 그녀의 마지막 허영

끼니를 거르더라도 내다 팔 수는 없지
손가락을 빨면 그뿐

피가 마르고 뼈가 녹아도
피아노는 안식
피아노는 구원

그녀를 피아노에 묶어
난바다로 떠밀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곧 눈을 감겠지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구체관절인형 - 김선향


아이가 운다
사금파리처럼

텔레비전 빛이 새어 나오는
어두운 방에서 홀로

친구들은 다 갖고 있는
구체관절인형이 자기만 없다고 운다

야, 이년아 그 돈이면 쌀이 반 가마여
어디서 인형 타령이여

구체인지, 관절인지
그게 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애비는 공사판에서 죽을 똥 살 똥인디

욕이란 걸 짐작하겠지
한국어를 잘 모른다고는 해도

노모는 베트남에서 온 손녀가 야속하다
어쩔 수 없이 입양한 손녀

손가락을 다친 아들 생각에
식전 댓바람부터

노모도 운다
묽은 죽처럼

 

 


# 김선향 시인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여자의 정면>이 있다. 현재 <사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오랫동안 여성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현재는 국제법률경영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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