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행 흐림 - 이규리

마루안 2021. 5. 15. 19:35

 

 

여행 흐림 - 이규리

 

 

여행은 골목을 바꾸는 일인데,

 

먼 골목 끝까지 가보았을 때

언젠가 내가 살았던 집인 것처럼

문을 밀자

뭉게뭉게 희부연 구름 덩이가 쏟아져나왔다

 

손을 휘저어보았지만

손은 잡히지 않았다

 

이 흐릿한 덩어리들은

다른 곳으로 던진 상한 마음인 것만 같고

덮은 증거도 같고

 

여행은 슬픔을 바꾸는 일인데,

 

나는 내  안의 말을 바꾸지 못하여

태도가 태도를 나무라고 있으니

 

그 골목 허전한 어디쯤 생의 청명이 있기나 하는지

펴보는 빈 손바닥은

머뭇거림과 갈등과 고립과

 

나는, 안 되는구나

 

길었구나

 

저 끝 돌아오라 누가 손짓을 해도

발바닥이 들러붙어 옴짝할 수 없는

 

구름 골목에서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이곳과 저곳 사이 - 이규리



다섯 평을 견디는 낮과 밤들아
너무 애쓰지 마
우리는 잊혀질 테니

식당에 앉아 혼자 밥을 먹는다

꿈, 그런 건 묻지 않는다

골목마다 반바지와 슬리퍼가 나오고
저 길이 발을 기억하게 될는지

비참하지 않기 위해 서로 말을 걸지 않는데
그게 더 비참인 걸 또 모르는 척한다

더위 정도는 일도 아니야
다섯 평을 견디는 이들은
세상이 그들을 견디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신림동은 산다 하지 않고
견딘다 한다
그래서 골목이 숨어라 숨어라
모서리를 만들어 준다

나도 이곳에 편입해
순두부 알밥 부대찌개 사이 모서리를 돌 때
가도 갈 수 없다는 걸

목이 메여
자꾸 목이 메여
목을 맬까 생각도 든다는 걸

언젠가 TV에서 본
한쪽 발에만
간신히 걸려 있던 삼선 슬리퍼
이건 끝을 모르는 이야기
갈매기처럼 한 곳을 향해 혼자 밥 먹던 이들아

슬퍼하지 마
우리는 잊혀질 테니
말없이 사라진 슬리퍼 한 짝처럼
슬리퍼조차 떠나간 빈 발처럼


 

 

# 이규리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으로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당신은 첫눈입니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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