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돗가에 뜬 달 - 이서린

마루안 2021. 5. 11. 22:17

 

 

수돗가에 뜬 달 - 이서린

 

 

마을 해치 장구 장단 젓가락 장단에 부부는 일찌감치 해당화 낯빛으로 감 냄새 풍기며 대문을 열었다

 

눈 흘기는 어린 딸의 볼 비비는 젊은 아비의 턱수염, 딸의 뺨에도 채송화가 피고

 

이미 물 건너간 저녁밥에 잔뜩 부은 볼 세상모를 조그만 계집아이의 심사(心思)

 

지아비에겐 여전히 어여쁜 젊은 지어미가 비틀비틀 수돗가에 쪼그려 앉는다 앉으면서 몸빼를 쑤욱 내리곤 쏴아아 한바탕 소낙비를 내린다

 

씨이, 대문 옆에 변소 있잖아 삐죽거리는 딸의 손을 꼬옥 잡는 아비

 

허허, 수둣가에 달이 떴네 오늘이 보름인가 내일이 보름인가 저 희고 고운 달 좀 봐라

 

그 해도 그 달도 지고 없는데

비 오는 달밤은 언제 또 보나

 

 

*시집/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출판그룹파란

 

 

 

 

 

 

그 남자 - 이서린

 

 

경상도에 살면서 서울 말씨 쓰던,

 

술 취한 밤 골목 끝 내가 왔노라 노래로 겁 없이 소문도 내고 도깨비와 한판 붙어 멋지게 이겼다며 윗니 아랫니 드러낸 채 거침없이 대문 열던 유도 유단자의 잘생긴,

 

007 제임스 본드 상영관에서 키스 장면엔 슬며시 내 눈을 가리던 담배 냄새 짙게 밴 손가락이 좋았지만 눈이 큰 나에겐 뒷모습만 보이던 그 남자, 늘 언니를 좋아했지

 

마루에서 기타 치며 노래할 때 무릎걸음으로 뒤로 가 기댄 적 있었는데 그의 체온과 등을 통한 목소리에 남몰래 눈물 흘리게 했던,

 

겨울 아침 학교 갈 때 운동화 찾으면 부엌 아궁이에 데웠다가 내주던 손이 따뜻한 서울 말씨의 남자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느닷없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 고백할 틈도 주지 않았지만 우리의 연순 여사가 사랑한

 

한 번, 정말 한 번만 안기고 싶은 어릴 적 내 짝사랑, 그 남자

 

 

 

 

*시인의 말

 

당신을 본다

살아 있다는 기척을 보여 주는 나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선

완강한 나무처럼

당신은 그렇게 오래 있어라

 

나,

당신에게 가는 중이니